▲성적 가치가 높은 여성이 높은 교환 가치를 지니는 사회에서 20대 여성은 여러 족쇄를 달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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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일 루빈은 1975년 논문 <여성거래>에서 여성의 경제적 '자산'으로서의 위치에 대해 분석했다. 많은 문명적 사회에서 여성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우호를 확인하기 위한 교환의 '파트너'보다는 증여의 대상, 관계의 연결 통로로서만 기능한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신부를 '건네주는' 사회적 관습은 원시적 산물이 아니라 문명화의 산물이다. 그리고 여성이 교환되고 거래되는 문명은 결혼이라는 제도로 구성된 여성의 '성적 가치', 또한 '재생산 가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기준에서 가장 '교환 가치가 높은' 여성은 성적 가치가 높고, 재생산 가치가 높은 여성이다. 충분히 문명화 된 사회에서 성적 가치는 단순히 젊음과 외모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성적 가치는 젊음과 외모에 더해서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치부하는 데에 저항하지 못하는 낮은 지위를 포괄하기 쉽다.
10대들이 '보호'라는 명목으로 억압당하기 때문에 성적 대상으로서 바라보는 데에 일정한 제한이 가해진다면 20대 여성에게는 더 이상 그런 보호가 적용되지 않는다. 세상은 무척 정교하게 20대 여성을 가장 적절한 교환 대상으로 점찍는다.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존재하더라도 20대 여성은 반드시 교환 대상으로서의 속성을 가진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 술자리에 있을 때, 관계와 관계 속에서 농담을 주고받을 때.
물론 30대나 40대가 되더라도 큰 틀에서 이 속성은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20대 여성의 '낮은 지위' 조차도 성적 가치로 환원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20대 여성의 미숙함이나 순진함은 곧잘 가장 높은 성적 가치로 포장된다. 덕분에 온갖 연애 관련 자기계발서에는 모르는 척하면서 '순진함'을 어필해서 남성들의 마음을 뺏으라는 조언이 수두룩하다.
어떤 여성들은 자신의 미숙함을 가장하거나 성적 가치를 부각시켜서 좀 더 편안하게 사회의 여러 고리들을 통과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어떤 남성들은 이런 20대 여성의 특징을 '권력'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 '권력'에 대한 질시에는 곧잘 남성 자신의 성적 가치에 대한 열망이 투영된다.
물론 이런 종류의 인정이나 가치들은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실제로는 자존감을 좀먹기 쉽다. 육체와 섹슈얼리티에 부여된 권력은 노력해서 얻은 권력도 아닐 뿐더러, 그 자체로 주체적 가치가 부여되는 것도 아니고 교환 대상으로서만 부여되고 있다. 돈을 가진 누군가가 좋은 물건을 거래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확하게 권력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성적 가치가 교환 대상으로서의 가치라고 하더라도 일단은 그것을 열망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여성 자신에게도 그 가치는 소중하다. 이 가치는 마치 타인의 욕망이 있는 한 여성에게 통제권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자기 자신의 통제권을 넘기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정확한 의미에서 권력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치 '권력'인 것 같은 환상이 되기 쉽다. 아무런 노력 없이도 끊임없이 자신에게 부여되는 유일한 가치가 이토록 불안정할 때 여성 자신의 삶은 당연하게 불안정하다.
선망과 질시를 동시에 받는 이 '권력'은 불안정하면서 동시에 비대칭적이다. 교환 가치로서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여성은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버려야 하는 것들 속에는 아주 중요한 자아의 부분들이 들어있다. 자신의 의지, 지식, 윤리, 신념 같은 것들이다. 성적 가치로 평가받아야 할 20대 여성이 이것들을 강력하게 드러낼 때마다 역시 사회는 교묘하게 여성을 처벌한다. '여자답지 못하다'거나, '그런 여자는 매력이 없다'거나, '나이답지 않다'는 말로 포장되는 수많은 처벌들이다.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그 '권력'조차도 쉽게 빼앗을 수 있다는 위협 앞에 가진 것이 많지 않은 여성들은 나약하다. 그런가하면 때로 그 권력을 자신의 힘으로 휘둘러서 사회적 고통을 보상받으려고 하는 여성들에게는 '걸레', '된장녀' 같은 처벌이 따라온다. 도망치려고 해도 존재 그 자체가 거래 대상이 되는 상황에서는 도무지 도망칠 수가 없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성의 변증법>에서 20대 초반의 여성들에 대해 "그들의 의식으로 무엇을 할지 모르는 의식화 된 집단"이라고 서술한 바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부당한 '권력'에 대해, 그것이 어떤 식으로 자신에게 자유와 구속을 선사하는지에 대해 20대 여성들은 직관적으로 알게 될 수밖에 없다.
소유자 자신의 통제권을 벗어나 있는, 이미 사회의 자산에 속한 것처럼 취급받는 이 '권력'은 막강하기까지 하다. 그렇기에 때로는 동료 여성들도 '성적 가치가 있는' 20대 여성이 사회적으로 착취당하는 데에서 동지가 되어주지 않는다. 사회적 관계망에 속해있는 한 여성들에게도 20대 여성은 훌륭한 증여 대상이다. 가장 매력적인 교환 대상, 젊고 미숙(할 것으로 기대되는)한 여성은 대부분의 인간에게 증여해서 일정한 이득을 얻거나 혹은 증여받고 싶은 대상으로 존재한다.
물론 경제적 상황과 지위에 따라서 크게 다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20대 여성에게 자신이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증여할 수 있는 권리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그것이 자신의 성적 가치일 때조차도.
20대 여성들은 이 '권력'의 어긋남을 예민하게 감각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거래 대상으로 바라보지만 그 자신은 명확하게 자아를 가진 인간으로 존재한다. 자신의 가치는 스스로에게 속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자아는 끊임없이 부정 당한다. '권력'은 여성 자신이 아니라 사회적 자산이기 때문에 사회는 계속해서 여성들에게 규율을 부과한다. 이것은 극도로 불안정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부당하다. 온갖 부당함의 교차점 위에 20대 여성의 성적 가치가 위태롭게 서 있다. 그리고 그 위태로움에 기반해서 사회는 문명을 조직한다.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30대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