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대명재 고택의 깊은 장맛이 느껴지는 곳이다.
임재만
고택 뒤로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이 있어 따라가 보았다. 붉은 빛을 두른 소나무가 피톤지드를 한껏 쏟아내며 반갑게 맞아준다.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기와지붕이 참 고풍스럽다.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은 나무계단으로 되어 있었다. 가파르지도 않아 누구나 오르기에 불편함이 없다. 사색하기에도 딱 좋은 길이다. 사월의 산속은 활엽수들의 세상이다. 막 피워낸 연초록 나뭇잎이 어찌나 예쁜지 눈을 뗄 수가 없다. 영혼까지 맑아지는 느낌이다.
숲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은 참으로 많은 것 같다. 맑은 공기를 주는 것은 물론 그림 같은 산 빛으로 마음을 몽땅 빼앗아 무아지경에 이르게 해주니 말이다.
전망대에 올랐다. 교촌마을과 함께 넓은 들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마을도 들도 제법 크다. 예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윤증(尹拯)선생은 소론의 영수로 호가 명재(明齋)이며 조선 숙종 때 사람이다. 왕이 우의정까지 벼슬을 여러 번 내렸으나 병자호란 때 순절한 어머니를 위해 모두 고사하고 초야에 묻혀 오로지 학문을 닦고 후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보통 양반집하면 높은 담장이 있어야 하지만 명재 고택은 담장도 대문도 없다. 그 이유는 뭘까? 명재선생은 죽기 전에 자기 제사상 크기(가로 세로 90센티)까지 미리 정하여 주고, 간소한 음식을 차릴것을 당부할 만큼 평소 생활이 검소하고 소박한 학자였다고 한다.
권문세가라고 하여 자기만 호위호식하려하지 않고, 1식 3찬의 소박한 식사를 하며 주변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늘 배려하였기에 주변에 원한도 적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굳이 외부인을 경계하는 높은 담을 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