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남을 위해 베푸는 삶을 살아온 곤양면 성내리 문기호 씨.
바른지역언론연대
2017년 4월 22일 토요일 오전. 사천시 곤양면 곤양종합시장 앞 도로와 주차장이 따스한 봄바람 속에 인산인해를 이뤘다. 곤양면 자생단체협의회가 주최한 '서삼면(곤양·곤명·서포) 효 경로잔치'가 열렸기 때문이다. 주최 측은 미리 준비한 의자 1000개가 일찌감치 동나자 부랴부랴 자리를 더 마련하느라 분주했다.
후미진 곳에서 이 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정장차림의 한 노인이 있었다. 여느 어르신들처럼 준비된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공연을 보고 음식을 즐겨도 될 법한데도, 얼굴엔 안절부절 근심이 어렸다.
그가 바로 '하병주가 만난 사람'의 이번 호 주인공 문기호(79)씨다. 문씨는 이번 행사를 위해 3000만 원을 쾌척했으니, 사실상 행사를 만든 주인공이다. 그런 그가 예상보다 많은 참석자에 놀라며 준비한 자리나 음식이 모자라지나 않을까 염려했던 것이다. 다행히 준비요원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 속에 그의 걱정은 곧 가라앉았다. 이날 서삼면 1500여 어르신들은 맛난 음식과 더불어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정을 나누고 회포를 풀었다.
이보다 하루 앞선 21일, 문 씨를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서부 3개면 어르신들을 초청해 경로잔치를 베푼다는 소식도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그보다 수십 평생을 늘 봉사하고 이웃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칭찬과 평판이 자자했기에, 행사에 앞서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던 까닭이다.
먼저 그가 살아온 이력을 간단히 짚어보자. 그는 1939년 곤양면 서정리에서 태어났다. 아주 어렸을 땐 살림이 나은 편이었으나 부모님 두 분 모두 병을 앓으면서 그의 유년과 청소년기는 찌든 가난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를 악문 집념과 성실함으로 스스로 삶을 바꿔 놓았다. 농사면 농사, 사업이면 사업, 그 무엇이든 똑 부러진 결과를 냈다.
그렇다고 그렇게 번 돈을 독차지 하진 않았다. 학생들에겐 장학금을, 학교엔 TV와 교육물품을, 마을엔 돌의자와 휴식처를, 경로당엔 TV와 보일러시설을, 끝으로 지역 어르신들을 위해선 경로관광 비용을 해마다 제공했다. 특히 1972년부터 2007년 사이, 61세 이상 노인 90명에게 33회에 걸쳐 1박2일 경로관광을 제공한 것은 그의 봉사하는 삶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흔적이다.
그의 선행은 최근까지 이어졌다. 2014년엔 곤양면 발전기금으로 1억 원을, 2015년엔 곤양면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또 1억 원을 기부했다. 곤양면민들은 이 돈을 합쳐서 곤양장학재단을 설립하고 문 씨를 초대 이사장에 추대했다. 올해는 곤양향교에 운영비 1000만 원을 쾌척하기도 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 때던가. 월사금이 밀려 선생님이 집에 가서 가져오라고 돌려보내곤 했지. 형편이 빤해서, 나는 집에는 안 가고 놀다가 돌아가곤 했는데, 어느 날 이웃집 아저씨가 5개월 치 돈을 준거야. 너무 감사했지. 말로 표현 다 못해. 그 때 마음먹었지. '나도 이 다음에 꼭 좋은 일 할끼다. 이것보다 천 배, 만 배 갚아 줄끼다.'"
그랬다. 그는 당시 어린 나이였지만 그날의 고마움을 마음 속 깊이 새기고 또 새겼다. 그러나 현실은 쓰렸다. 가난은 그에게 곤양초등학교를 처음이자 마지막 모교로 남겨준 것이다.
"어느 날 고구마를 지고 하동 진교로 팔러 갔는데, 길에서 책보따리를 메고 가는 친구들을 만난기라. 너무 부럽고 부끄러웠지. 그날 고구마를 다 우찌 팔았는지 몰라. 집에 돌아와서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공부했지. 학교는 못 가더라도 지식에 있어 친구들에게 지고 싶지 않았거든."그의 깡다구는 대단했다. 어쩌면 그의 삶을 관통하는 핵심 열쇠어가 '악착같은 기질이나 힘'을 뜻하는 이 '깡다구'인지도 모르겠다.
"내 인생에 3무(三無)가 있어. 첫째가 술이야. 어렸을 적 삼촌의 술주정을 보며 절대 술을 안 하리라 마음먹었지. 그대로 실천했고. 둘째는 낚시야. 언젠가 친구들과 섬에 낚시를 갔다가 기상이 나빠 그날 못 돌아온 적이 있는데, 씨나락을 담그고 왔던 터라 꼭 돌아가야 했거든. 다음 날 집에 오니 어머니가 불편한 몸으로 일을 다 한 거야. 그러면서 야단은커녕 배를 곯으면 안 된다고 밥을 챙겨주시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났지. 그 뒤로 낚시 끊었어. 셋째는 학업이야. 공부도 곧잘 했기에 주변에서 검정고시라도 쳐라고 야단이었지. 하지만 그럴 형편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 돈을 벌어야 했지."그는 논농사와 밭농사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 농사 지었다. 한때는 벌도 키웠다. 식당도 열었고 석재상도 운영했다. 사업은 그럭저럭 잘 되었다. 그는 어느 듯 '30:30:30'이란 원칙을 세웠고 '남을 위해 쓰겠다'는 어릴 적 다짐을 실천하려 애썼다. '30:30:30'이란 번 돈의 30%는 가정에, 30%는 사업에, 30%는 사회에 환원한다는 원칙이다. 초등학교 4학년 어린 문 씨의 다짐이 조금씩 실천되기 시작했음이다.
그는 살아오는 동안 늘 지역사회를 생각하며 살았다. 한때는 군의 중심이었으나 세월의 변화 속에 점점 작아지는 곤양면의 위상을 지켜보는 일은 힘겨웠다. 그래서 1995년엔 사천시의원선거에 출마해 당선함으로써, 사천시정에서 곤양면을 비롯한 서부 3개면의 위상을 높이는 일에 힘을 쏟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