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말했다.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거야. 어떤 형태로든 사랑이 있어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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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가 행복하다고 하니 내 맘도 기뻤다. 두 분은 점점 닭살이자 민폐 커플이 되었다. 같이 식사를 할 때면 서로 더 먹으라고 고기를 서로의 밥그릇에 올려놓느라 도무지 식사가 끝나질 않았고 눈만 마주쳐도 서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나와 그녀를 번갈아 보더니 "아주 비슷하니 자매 같아 보여요. 아주 보기 좋아요" 한다. 그녀는 "아이고 무슨... 말도 안되는 말씀을 그리 하세요. 호호호..." 하면서 마냥 즐거워했다. 그녀는 내 엄마랑 동갑이었고 나는 그냥 따라 웃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2016년 4월 13일. 그 날은 국회의원 선거가 있던 날이었다. 새벽 1시 돌연 택규씨의 그녀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큰 병 없이 지내온 그녀였기에 그의 충격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나이 76세였다.
그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가끔 인지상태가 제로가 되기도 했다. 길을 가다가 길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집에서도 문을 열고 자서 심한 감기에 걸리기도 했다. 그는 공황상태에 빠진 것이다. 5남매가 돌아가면서 그를 돌봐주고 위로했지만 그 무엇도 그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다.
나는 그 전보다도 자주 그를 보러 갔다. 집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나는 그의 등을 어루 만져준다. 뭐 하고 있었냐고 물어본 후 그의 손을 잡는다. 얼어있던 그의 얼굴이 다소 풀어지는 걸 느끼며 그의 하소연을 들어준다. 건강했던 그녀를 아무런 준비 없이 잃어버리고 그는 심하게 자책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못해준 것만 떠오른다며, 후회되는 일, 다시 만나면 꼭 해주고 싶은 일들, 등등 마치 처음 얘기 하듯 상세히 말한다. 이미 대사까지 외울 만큼 많이 들은 얘기지만 나 또한 처음 듣듯이 반응한다. 그것이 그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며.
그의 눈에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을 버텼다.
지난 주 나는 며칠 후 있을 그녀의 첫 번째 기일에 '같이 산소에 갈 것'을 의논하면서 그와 순대국밥을 먹었다. 그는 예전에 복지관에서 함께 공부했던 할머니가 자신의 소식을 듣고 위로하러 집에 한 번 왔었다고 얘기했다.
그 분과 얘기를 나누니 자신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주고 말이 잘 통해서 좋았다고 했다. 그 분이 찾아와준 거에 대한 보답으로 식사 대접이라도 한 번 하고 싶은데 옆에 사는 딸의 감시(걱정) 때문에 나갈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거야. 어떤 형태로든 사랑이 있어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가 있어" 했다. 나는 그의 입가에 서린 흐린 미소를 보았다.
그와 나는 이번 일요일에 그녀의 산소에 갔다. 그는 그 곳에서 자주 못 와서 미안하다고 울먹였다. 나는 그가 그녀와 할 말이 많이 있을 거 같아 슬쩍 자리를 피했다. 산소에서 93세의 그를 부축하고 내려오는 길에 배꽃이 흐드러지게 핀 배나무 과수원을 보고 그가 선창을 했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그리고 그 뒤를 잊어버린 듯 나를 쳐다 보기에 내가 그 뒤를 받았다.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우리는 그렇게 산을 내려왔다.
택규씨는 나의 시아버님이다. 그와 나는 그와 그 친 자식들이 느끼는 가족의 유대감과 좀 다른 의미로 깊은 친밀감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 나는 말이 통하는 며느리이자 친구이며 늘 든든한 그의 정서적 후원자이다. 나는 그를 마음 깊이 존경한다. 그는 사랑이 뭔지를 내게 보여준 사람이다.
93세에도 마음이 보들보들 살아있다. 남편과 나는 비밀이 많다. 거의는 그에 관한 것들이다. 내가 그에게 무한 신뢰를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버님! 다음 주말에 제가 알리바이 만들어 드릴 테니 그 분께 식사대접도 하시고 말씀 나누세요"라고 전화 드렸더니 잠시 머뭇거리시더니 "그럴래?" 하신다. 나는 이 밤에 '다정도 병인 택규씨'가 잠 못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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