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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여행
야나세 다카시 님이 아흔 넘은 나이에 글을 쓴 <네, 호빵맨입니다>(지식여행 펴냄)라는 책을 읽는 내내 곰곰이 생각합니다. 저도 아흔 넘은 나이에도 씩씩하고 튼튼하게 살아서 제 나름대로 걸어온 길을 젊은 뒷사람한테 즐겁게 들려줄 수 있으면 좋겠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아흔 살뿐 아니라 백 살이 넘은 뒤에도, 또는 백열 살이나 백스무 살에도, 어쩌면 이백 살까지 기운차게 살아서 젊은 뒷사람이 새롭게 기운을 북돋우도록 이끄는 말을 남길 만하면 신나겠구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야나세 다카시 님은 자그마치 일흔이 넘고서야 비로소 이녁 어릴 적 꿈인 '만화가'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흔넷 나이에 조용히 숨을 거두기까지 '만화 새롭게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해요. <네, 호빵맨입니다>라는 책도 아흔을 훌쩍 넘은 나이에 썼으니 대단하지요.
이분한테는 '나이'가 조금도 걸림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분한테 나이는 '남들보다 더 오래 살면서 더 오래 삶을 지켜본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기쁨이라 할 만합니다. 더군다나 '남들보다 더 오래 꿈을 못 이룬 쓰라린 맛'을 삭히고 달랜 이야기까지 들려줄 수 있지요.
"호빵맨을 그린 게 저예요"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깜짝 놀란다. 아무래도 아흔 넘은 할아버지가 호빵맨을 그리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 드디어 인기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때가 일흔 살 고희를 맞이한 후였다. 적어도 1년은 채우자는 마음으로 시작했건만 벌써 20년이 넘었다. (49, 65쪽)
운이 그렇게 '나 몰라라' 하는 식의 수동적인 개념이라면, 노력할 의미 따위 없어지고 만다. 운이란 스스로 불러들이고, 스스로 붙잡는 것. 자신의 힘으로 개척하고, 자신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67쪽)한국에서 예순 넘은 나이에 비로소 수채화라는 그림을 홀가분하게 그리고서,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즐겁게 이 수채화를 그리다가, 마지막 숨 한 번 들이쉴 때까지 붓을 놓지 않던 박정희 할머님을 떠올려 봅니다.
이 수채화 할머님이나 야나세 다카시라는 만화 할아버님은 이녁 스스로 이루려는 꿈을 늘 가슴에 품으셨어요. 비록 이 꿈을 예순 해나 일흔 해를 사는 동안 한 번조차 못 이루더라도 이 꿈을 고이 품으셨습니다. 품고 품으며 또 품어요. 다시 품고 새로 품으며 거듭 품어요. 언제인가 꼭 이루겠노라 하는 마음으로 참말 씩씩하게 삶을 일굽니다.
우리 둘레에는 일흔뿐 아니라 여든이나 아흔이 되어도 꿈을 못 이루는 이웃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고 죽기를 되풀이해도 도무지 꿈하고 맞닿지 못하는 이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꿈은 어떻게 이룰까요? 꿈은 왜 못 이룰까요? 가난하기 때문에 꿈을 못 이루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힘이 들거나 나이가 많아서 꿈을 못 이루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우리 스스로 꿈을 제대로 그리지 못한 탓에 꿈에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는구나 싶어요. 우리 스스로 꼭 하루라도 꿈을 놓거나 잊는 사이에 꿈하고 멀어지는구나 싶어요.
아흔넷이라는 나이까지 호빵맨 만화를 그린 만화 할아버지는 우리 젊은이한테 이 대목을 차분하게 짚어서 일깨우려고 합니다. 다만 가르침을 베풀지는 않아요. 이녁 스스로 아흔이라는 나이를 훌쩍 넘도록 살며 늦깎이 만화가 길을 이루어 살다 보니 '꿈은 젊은 날 이루든 늙은 날 이루든 모두 똑같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네 하고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