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질 내 고향경향신문에 나온 기사
안건모
마동욱은 2미터짜리 사다리 세 개를 조립해 6미터 사다리를 만들어 차에 싣고 다니면서 마을 사진을 날마다 찍었다. 수몰 지역인 유치면이 현대사의 가장 아픈 사연들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는 것을 사진과 영상을 촬영하며 알게 되었다.
1948년 여순사건이 일어나고 빨치산들이 먼저 들어와 해방구가 되었던 곳이 유치면이었다. 낮에는 군이, 밤에는 빨치산이 번갈아 상주했다. 결국 빨치산 토벌작전으로 마을 스무여 곳이 농가가 몇 채 안 남고 모두 불에 타 사라졌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휴전이 되었던 1953년 즈음, 뿔뿔이 흩어져 살던 유치면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마동욱은 유치면뿐만 아니라 고향의 모든 마을을 사진에 담았다. 백로와 왜가리가 한가로이 거닐고 수달이 헤엄치는 고향 탐진강변을 담았다. 고향은 옛 모습 그대로 살아 있었다. 한마디로 생태계의 보고였다.
하류에는 천연기념물 258호인 무태장어가 살아 있고 송사리, 피라미, 칼납자루, 버들매치, 각시붕어 등 토종 물고기들이 남아 있는 청정지대였다.
마동욱은 마을 역사의 현장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탐진강 일대는 전봉준이 최후까지 항전했던 동학혁명의 마지막 전투장인 장흥읍의 석대들 현장이다. 3천여 명의 농민군이 마지막으로 일본군들에게 사살되었던 곳이다.
마동욱은 장흥군 유치면 탐진댐 수몰지의 사진들을 모아 <아! 물에 잠길 내고향>(호영, 1997)이라는 사진집을 출간했다. 그는 국내 최초로 '마을사진작가'라는 닉네임을 부여받았다.
사진만 찍고 먹고 살 수는 없어 분식점을 내다사진만 찍고 먹고살 수는 없었다. 마동욱은 장흥군청 앞에 '빛 그리고 그림자'라는 분식점을 냈다. 식당 이름까지 지어 준 소설가 한승원 등 둘레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빚을 내야 할 판이었는데 당시 주민등록 갱신을 할 때라 주민들 주민등록 사진을 찍어 조금 도움이 됐다.
얼마 뒤부터 수몰 공사가 시작됐다. 마동욱은 걸핏하면 수몰 지역으로 가서 사진을 찍으니 배달이 잘 될 리 없었다. 아내는 그런 마동욱에게 수없이 말했다.
"여보, 이젠 제발 정신을 차리고 배달이나 열심히 하면 안 될까? 당신은 어떻게 일 년에 한 번씩 큰 사고를 쳐."
그런 중에도 마동욱은 돈키호테 같은 계획을 실행한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남북 화해 무드가 무르익어 경의선 철도를 복원하기로 했다. 마동욱은 목포에서 런던까지 육로로 가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경의선 복원'과 '통일'을 기원하는 뜻으로 목포에서 임진각까지는 철로 길을 걸어서 가기로 했다. 예언가처럼 김대중 대통령이 경의선 복원을 이야기할 거라는 마동욱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던 철도청 관계자는, 며칠 뒤 김대중 대통령이 경의선을 복원한다는 말을 듣고 결국 마동욱이 철로 길을 가는 계획에 승인을 해준다.
마동욱은 2000년 가을부터 시인 이대흠과 한 달 동안 문산까지 걸었다. 중간 중간에 다른 언론사들이 합류할 때도 있었다.
"철도청에서 승인해 줄 때 철도 시간표만 주고 가라고 했다. 위험한 때도 있었다. 다섯 명이 좁은 터널을 걸어가는데 열차가 들어왔다. 기겁을 했다. 다행히 터널 안에 설치된 대피소로 피해 겨우 살았다. 알고 보니 기차 시간표에 나와 있지 않은 화물열차였다."
광주 MBC 방송팀이 합류해 방송도 나갔다. 그때부터 철도청에서는 구간마다 보선팀을 붙여 줘 안내를 했다. 찌는 듯한 폭염과 때때로 내리는 비 때문에 녹초가 되는 날이 이어졌다. 사타구니가 헤지고 발가락 여기저기에 물집들이 터지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서울역을 들어서니까 환영 인파가 모여 있었다.
이들은 다시 임진각까지 철도 길을 걸었다. 거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경의선 철도가 복원됐지만 분단선을 넘어 신의주까지 갈 수는 없었다. 그 성과물이 <그리운 사람은 기차를 타고 온다>(글 이대흠·사진 마동욱, 다지리, 2000)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