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공원내 형무소에 끌려가면서 가족들을 뒤돌아보는 형상의 조형물의 모습
심명남
제주 4.3평화공원은 제주4.3사건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4.3 사건의 도화선은 1947년 3.1절 기념대회후 이날 시위행렬이 오후 2시 24분께 관덕정 앞 광장을 지날 때였다. 기마경찰이 탄 말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후 달아는 경찰을 향해 아이가 돌을 던졌고 경찰은 발포로 응했다. 경찰이 쏜 총에 북초등학교 5학년 허두용군을 비롯하여 6명이 사망하자 제주도민이 들끓기 시작했다. 이후 3.10총파업으로 이어지며 제주도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만다. 공무원인 도청부터 시작해 법원, 검찰 등 관공서와 금융기관, 학교 등으로 번져 166개 기관 4만1211명이 파업에 참석해 제주도민 6가지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당시 제주도청 공무원 파업 요구조건은 ▲ 민주경찰 완전 확립을 위해 무장과 고문을 즉각 폐지할 것 ▲ 발포책임자 및 발포경관은 즉시 처벌할 것 ▲ 경찰 수뇌부는 인책 사임할 것 ▲ 희생자 유가족 및 부상자에 대한 생활을 보장할 것 ▲ 3.1사건에 관련한 애국적 인사를 검속치 말 것 ▲ 일본 경찰의 유업적 계승활동을 소통할 것 등이었다.
군경이 이에 응하지 않자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민중들의 무장봉기가 시작된다. 이후 미군정은 강경진압으로 선회해, 군경수뇌부에서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하던 김익렬 연대장을 전격해임하고 박진경 중령을 임명하며 제주 초토화 작전이 시작된다. 이로인해 수많은 희생자가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