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6월에 미국으로 입양된 이숙희씨
이숙희
- 지난 2009년부터 8년간 친모 이정희씨를 찾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그리고 그동안 성과는 있었나?"지난 2009년 나는 결혼을 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내 뿌리가 너무나 궁금해졌다. 그래서 먼저 미국에 있는 입양기관에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미국입양기관으로부터 내 친모의 이름, 나이 등 내가 미국으로 입양 보내지게 된 사연이 담긴 기록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그 후 한국에 있는 해외입양인연대(G.O.A.L.)에 도움을 요청하여 지난 2010년 해외입양 보내진 후 처음으로 친모를 찾기 위해 모국인 한국을 방문했다. 그때 한국에 와서 지난 1984년 내가 미국으로 입양 보내지기 전 잠시 나를 돌봐주신 부산의 한 위탁가정의 위탁모와 감동어린 재회를 했다. 하지만 위탁모는 내 친모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고 하셨다. 그때 나는 내가 태어났던 부산진구 일대와 파출소 등을 수소문 했지만 내 입양기록이나 친모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그때 난 한국에만 오면 친모를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럴 수 없어서 너무나 절망했다. 7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친모를 찾을 수 있다면 정말 원이 없겠다.
그 후 나는 실의에 젖은 상태에서 미국으로 돌아왔고 미국에 살면서 한국의 몇몇 언론사와 스카이프로 인터뷰를 하면서 친모를 수소문 했다. 그 후 한국에서 몇몇 분이 내 한국가족이라고 연락을 해 와서 벅차오르는 흥분을 가슴에 안고 DNA를 검사했지만 다 맞지 않았다. 그때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나를 미국으로 입양 보낸 한국 동방사회복지회에 친모를 찾아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동방사회복지회는 한국에는 1958년생으로 이정희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들이 너무 많아 주민등록번호를 모르면 친모를 찾기가 불가능하다고 내게 통보했다. 이때 나는 너무 답답했다.
해외입양인연대 회원들은 서울과 부산의 길거리에서 내 어린 시절 얼굴사진과 입양당시 정보가 담긴 소책자를 만들어 행인들에게 나눠주며 내 친모를 찾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해주셨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이제라도 더 늦기 전에 오마이뉴스에서 내 사연을 한국사회에 알려 주시기를 요청드린다. 지금 다시 한국에 가서 내 사연이 담긴 소책자를 서울과 부산의 길거리에서 행인들에게 직접 배포하며 친모를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두 아기들을 돌보아야 하는 엄마다. 또 한국에 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아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하고 있다.
지난 8년 전부터 지금까지 난 시간이 날 때마다 친모를 찾기 백방으로 문의하고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어떨 때는 극심한 절망감과 슬픔에 젖어 잠도 못 이뤘다. 이러다 친모를 영원히 못 찾지 않을까 걱정과 우려도 많이 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친모 찾기를 포기하지 못하겠다. 제발 오마이뉴스에서 내 친모 찾기를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요청 드린다."
"해외입양인의 근원적 고통은 어떤 말로도 설명이 불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