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덕수궁 앞의 친박 집회.
김종성
재벌 다음으로 박근혜를 위해 울어줘야 할 사람들이 있다. 박정희 시절에, 재벌만은 못해도 그에 버금가는 혜택을 입은 계층이다. 그런데 이들은 촛불 혁명 과정에서 박근혜를 버렸을 뿐만 아니라 성토하는 데까지 앞장섰다.
조중동은 왜 곤경에 처한 박근혜를 내버려뒀나
이 점은 조중동 같은 보수 언론이 촛불 혁명 초반에 박근혜·최순실을 열렬히 성토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박정희 시절에 재벌 버금가는 혜택을 입었을 뿐 아니라 그런 혜택을 입은 계층을 대변하는 보수 언론은 곤경에 처한 박근혜에게 일말의 동정도 보이지 않았다.
촛불 혁명 전부터 '박근혜 불통론'을 유포하며 박근혜와 기득권층을 분열시킨 보수 언론은, 촛불 혁명 과정에서 진보 언론이나 야당보다 훨씬 더 매섭게 박근혜를 몰아붙였다. 보수 언론은 나중에는 탄핵반대 집회를 비중 있게 보도했지만, 이것은 박근혜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다. 촛불집회 쪽으로 더 이상의 힘이 쏠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견제 조치에 불과했다.
박근혜 비판 여론이 예상 밖으로 확대되고 촛불집회에 의해 나라가 좌지우지되자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운다'는 속담이 바로 우리 이야기가 아닌가 싶어서 서둘러 상황을 진화하려고 탄핵반대 집회를 이용했을 뿐이다.
이렇게 재벌 다음으로 박정희에게 혜택을 입은 사람들도 박근혜 성토에 앞장서고 탄핵반대 집회까지 이용했다. 이런 마당에, 그렇지도 않은 사람들이 박근혜를 위해 대성통곡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촛불집회에 섞여 있는 일부 기득권층 사람들을 뺀 나머지 대다수의 보통 서민들이 친재벌 집단인 박정희·박근혜 정권을 위해 그렇게까지 눈물을 흘려야 할 이유가 있을까?
물론 정치지도자로부터 물질적 혜택을 입지 못했어도, 지지자들이 그를 위해 울 수는 있다. 지지층과 지도자가 동일한 운명에 처했다고 판단될 때에 그럴 수 있다. 1919년 3월 식민지 조선 백성들이 고종황제의 죽음을 슬퍼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전직 황제와 자신들이 동일한 운명에 처했다고 판단됐기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고종황제 장례식에서 백성들이 흘렸던 눈물의 의미1592년 임진왜란 때만 해도 일본군을 막겠다며 의병 활동을 자원했던 조선 백성들이 1905년 을사늑약(이른바 을사보호조약) 때와 1910년 경술국치 때는 담담하게 침묵을 지켰다. 물론 1905년 이후에도 의병 활동은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에 비하면 현저히 약한 수준이었다. 그렇게 민심이 차갑게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1894년과 1895년에 조선왕조의 무능과 경제 파탄을 규탄할 목적으로 수십만의 조선 백성들이 무기를 들고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 이를 자체적으로 진압할 수 없었던 조선 정부는 처음에는 청나라 군대의 도움을 빌리려다가 여의치 않자, 나중에는 일본 군대의 힘을 빌려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그로부터 10년 뒤에 을사늑약으로 조선왕조가 외교권을 빼앗겨도 일반 대중이 덤덤한 반응을 보인 것은 바로 그때의 경험 때문이다. 조선 왕조가 일반 백성 편이 아니라는 것을 피부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무너진 왕조에 대해 일부 양반들이 자결로써 충성심을 표시할 때에 대다수 평민들이 차갑고 냉랭한 반응을 보인 것은 왕조에 대해 이미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전쟁으로 망한 나라가 아니다.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국력이 소진됐고, 그래서 외세의 농간에 쉽게 넘어갔던 것이다. 백성들이 버린 나라이기 때문에 외세에 쉽게 짓밟혔던 것이다.
그랬던 조선 백성들이 1919년 3월 고종황제 장례식에 모여들어 대성통곡을 했다. 1910년만 해도 고종황제에게 냉담했던 백성들이 불과 9년 만에 태도를 바꾼 것이다. 조선왕조가 망했으니 굳이 그렇게 서럽게 울 이유가 없는데도 고종을 위해 대성통곡을 했다.
백성들이 고종을 위해 운 것은 그가 불쌍해서라기보다는, 자신들과 고종이 같은 운명에 처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토지조사사업으로 농토를 빼앗기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조선 백성들은 고종이 일본에 의해 독살된 것 같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들과 고종이 같은 불행에 빠져 있다고 느꼈다. 동병상련을 느낀 것이다.
그런 분위기가 조선 백성들을 3월의 장례식으로 이끌고 또 만세운동으로 이끌었다. 일본 때문에 불행한 운명에 처한 고종과 자신들을 동일시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