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탄생. 새인생의 시작.
최지용
새벽 2시에 양수가 터졌다. 결혼 전부터 아내와 함께 살던 고양이 두 마리를 처형에게 맡기고 돌아온 밤이었다. 처형은 헤어지면서 "열매(태명)야 내일 보자"라고 말했다. '곧 만나자'는 인사였지만 말이 씨가 됐다. 예정일은 2주나 남아 있었다. 아내가 옷을 챙겨 입는 사이 대충 필요한 짐을 챙겼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고 차 안도 쌀쌀했다. 진통이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2016년 11월 3일 오후6시. 아내는 딸을 낳았다.
핏덩이 아기를 아내 품에 잠시 놓았다가 탯줄을 끊고 따뜻한 물에 씻겼다. 도와주던 간호사가 말했다. "오른쪽 손가락 다섯 개, 왼쪽 다섯 개, 발가락도 열 개 다 잘 있어요." 이미 뱃속에 있을 때부터 초음파로 다 확인했었다. 그럼에도 그 말이 귀에 꽂혔다. 나도 모르게 아기 손가락을 세어 보았다. 아기는 마치 세상에 잘 나왔다고 인증하는 것처럼 내 손가락을 꼭 쥐었다.
대부분의 아빠들이 그렇겠지만, 그 순간의 감정을 말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아파하는 아내에게 미안함, 아이를 안았을 때 알 수 없는 감격, 겪어보지 못한 무게의 책임감, 그리고 앞으로 일들에 대한 불안함이 뒤엉켰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수없이 보던 장면이었는데, 이 감정을 온전히 전달한 배우는 없었던 것 같다. 아내는 분만실에서, 아기는 신생아실에서, 나는 복도에 서서 각자 다른 울음을 터뜨렸다.
가장이 된 아내, 일과 가정의 양립 고민하는 남편아내를 만난 건 3년 전이다. 나보다 다섯 살이 어렸고 막 서른이 됐던 참이다. 직업은 한의사. 무려 전문직이다. 소개를 시켜준 회사 동기가 준 정보는 많지 않았다. 대개 사람들이 생각하듯 남자 보는 눈이 높을 거라고 생각하며 조금 위축됐다. 소개팅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이 됐지만, 막상 얘기를 시작하니 통하는 점이 많았다. 아내는 기자라는 직업에 호기심이 많았다.
반면 나는 그렇지 않았다. 한의대가 있는 학교를 나와 주변에 친한 한의사들이 꽤 있었다. 아내가 일하는 의료생활협동조합이 어떤 곳인지도 대략 알고 있었다. 아내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보통 받는 질문들을 내가 하지 않는 것에 신기해했다. 불필요한 물음들을 걷어내니 금방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멋진 여성이었다. 여행과 고양이를 좋아했다. 자기 일을 사랑하고 꿈이 많았다. 과감하고 긍정적이고 활발한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아내 자랑은 팔불출이라지만 조금 더 해보련다. 아내가 원장으로 일했던 안산의료생협은 영리를 추구하기보다 지역사회에 질 좋은 의료서비스를 합리적 비용으로 제공하는 곳이다. 대학 때부터 꾸준히 사회 공익적인 활동을 해왔고 직장도 그런 곳으로 잡았다. 또 행동하는의사회 일원으로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운영하는 '쉼터'에서 수 년 동안 심리 상담과 의료 활동을 했다. 쉼터는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이 머무르는 곳이다.
이 사람과 만난다면 배울 점이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아내도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 아니, 오히려 관계를 주도했다. 먼저 연락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데이트에서도 적극적이었다. 살면서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라 살짝 당황스럽기도 했다. 나중에 왜 그랬는지 아내에게 물으니 직장 가까이 이사할 때 도우러 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가스레인지 환풍기 후드 닦아주는 모습에 반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서울-안산을 오가는 장거리 아닌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다. 모두의 연애가 그렇듯 마냥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다. 아내는 "기자가 그렇게 바쁜 직업인 줄 몰랐다, 일주일에 기사 한두 개만 쓰면 되는 줄 알았다, 속았다"라는 말을 자주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안산으로 달려갔지만 아내에게는 충분하지 못했다. 아내는 내가 자신보다 일과 자기 시간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고, 나는 미안하면서도 답답했다.
나 역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연애였다. 업무로 바쁘기도 했지만, 나만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나는 대부분의 여가시간에 술을 마시거나 운동을 했다. 술을 마셨으니 운동을 했고, 운동을 했으니 술을 마셨다. 농구하고 술 마시고, 야구하고 술 마시고, 당구치고 술 마시는 게 인생의 낙이었다. 꽤나 건전한 취미생활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먼 거리의 연애는 이 모든 것을 제약했다.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미안함보다 답답함이 커졌다.
다행히 나와 아내는 현명한 편이었다. 무엇이 더 소중한지 알고 있었다. 양보와 타협이 이뤄졌다. 물론 각자가 좀 더 손해를 봤고 양보를 많이 했다고 생각하는 건 여전했다. 그때부터 결혼을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사람과 오래 함께 할 거라면 결혼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결혼을 하면 아내의 불안함도 조금은 덜어지지 않을까? 그럼 나도 좀 더 안정적으로 일과 '취미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연애를 한 지 1년쯤 됐을 때다.
아내는 직장을 그만뒀다. 남자의 월급은 정규직 노동자 평균임금에 훨씬 못 미쳤고, 부끄럽게도 모아둔 돈도 없었다. 결혼을 한다면 아내가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안산보다는 서울에 가까운 안양에 터를 잡고 대출을 받아 한의원을 개업했다. 시장 골목 허름한 건물 2층에 작은 '동네한의원'이었다. 아내는 직원을 세 명 뒀다. 규모에 맞지 않았지만 아내는 직원들이 힘들면 좋은 서비스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처우도 다른 곳보다 좋았다. 망하는 한의원도 많다는 때에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아내의 의욕이 대단했다. 또 실력과 판단을 믿었다. 아내는 가끔 "40대에 '명의'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명의'라는 자격증 시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하면 명의라고 할 수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마치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게 꿈이라고 말하는 아이를 보는 것처럼. 아내는 일하면서, 사회활동을 하면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의원 개업은 아내의 꿈에 한 발 다가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결혼 하는 게 그 꿈에 방해가 돼서는 안됐다. 아내에게 프러포즈를 하면서 "서로의 삶을 소모하지 말고, 더 풍요롭게 만들자"라고 말했다. 낭만적인 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런 마음으로 산다면 서로를 원망하는 결혼 생활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특히 더 이상 '속았다'라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한국사회에 많은 여성들의 고민인 '일과 가정의 양립'이 나의 고민이 되는 순간이었다. 아내가 '명의'를 꿈꾸듯 나 역시 '좋은 기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자취방에 어떤 여자가 와서 살고 있어"우리는 한의원과 가까운 광명에 집을 얻었다.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양가 부모님의 관여는 최소화했다. 양해를 구했고, 이해해주셨다. 거의 모든 준비를 둘의 의지대로 진행했다. 아내의 의견을 대부분 수용했고, 정 맞지 않는 부분은 서로 설득했다. 결혼식을 7개월가량 앞두고 우리는 동거를 시작했다. 어머니와 여동생 말고 다른 여성과는 처음 한 집에서 살게 된 것이다. 당연히 쉬울 리 없었다.
평소 결혼하는 친구나 후배들에게 '가사는 도와주는 게 아니라 같이 하는 것'이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이제 내가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할 때가 됐다. 나는 보통 오전 7시에 집을 나섰다. 그때 아내는 거의 대부분 잠들어 있다. 한의원까지는 8시40분에 출근해도 넉넉한 거리다. 그리고 진료를 마치고 집에 오면 7시 20분 정도 됐다. 일 때문에 늦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난 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고 야근도 잦았다.
아내가 집에 더 오래 있지만 가사노동은 6:4 정도로 내가 많이 했다. 그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내가 체력적으로 월등했다. 나는 하루 평균 5~6시간만 자도 됐지만, 아내는 최소 8시간 이상을 자야했다. 집안일은 결국 체력으로 하는 거다. 능률도 내가 높았다. 청소시간도 적게 걸리고 더 깔끔했다. 아내는 청소해서 힘들고, 나는 집 상태가 마음에 안 들어 기분 나쁜 상황을 굳이 만들 필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