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무작정 오지마라> 책 표지
시대의창
제주에 오면 육지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것들을 경험해 보고, 육지에서는 보기 힘든 것들을 보고, 육지에서는 할 수 없는 호사들을 누릴 수 있는 게 꽤 있다. 당장 올레길과 오름, 감귤밭을 떠올릴 분들이 많겠으나 이런 것들을 제외하고도 찾아보면 도처에 널려있다. 몇 개월간 제주살이를 하면서 내가 찾아낸 것들의 목록은 대강 이렇다.
서점을 비롯한 헌책방, 모텔을 개조해 만든 게스트하우스들과 오래된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독특한 분위기의 카페들, 회를 비롯한 값싸고 풍부한 해산물들, 그 끝을 알 수 없이 꾸불꾸불 이어지는 미로와 같은 아기자기한 돌담길들, 내가 40여 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지금껏 대한민국 그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외국어스러운 독특한 사투리는 제주를 제주답게 하는 매력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눈 덮인 한라산을 보면서 목욕하는 호사이다. 슬슬 관절에도 변화가 오고 겨울이 되면 이따금 온몸이 뻐근한, 사십대 아줌마로서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이다.
대중 목욕탕에 갔다가 왜 창문 위쪽만 시트지를 안 붙여놨나 했더니 다른 이유는 없다. 오직 한라산 백록담이 보인다는 이유였다. 한라산과 백록담은 제주의 상징이요, 제주인들의 자랑이다. 때론, 제주 그 자체다.
"자신의 고향을 달콤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심약한 초심자이리라. 또 어디를 가도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강건한 사람이다. 그러나 완벽한 사람은 온 세상을 낯선 것처럼 느끼는 사람이리라."이 책은 첫 장은 생 빅토르 후고의 명언으로 시작한다. 저자는 국민일보와 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로 있다가 제주에서 약 5년간 살았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제주도를 떠났다.
'의미 있는 삶에 장소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에게 그 장소가 제주도일까요? 아름다운 자연과 맑은 공기는 제주도로 이주하려는 이들이 꼽는 공통된 이유일 것입니다. 또한 한적함과 여유로움도 제주도의 매력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면에서 제주도는 엄청난 특혜 지역이 분명합니다.'저자는 철저한 준비 없이 막연하게 제주도로 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게 된 젊은이들을 소개하면서 얼치기 강사들의 말에 속지 말라고 한다.
'소위 잘나간다는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설파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런 말은 유혹을 넘어선 현혹입니다. 현혹은 거짓보다도 더 나쁜 사기가 될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말하는 그들의 이력만 봐도 그 말이 현혹임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애초부터 명문 대학을 나와 의사나 변호사, 대학교수와 같은 평생이 보장된 직업을 가진 기득권자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들이 10대, 20대 때에 단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그 학과나 직업을 선택했을까요? 또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학과나 직업을 저버림으로써 지금의 인기를 얻고 있다는 이율배반은 무엇을 말하는 건가요? 변신이며 혁명일까요? 그들은 니체가 말하는 이기적인 권력의지의 또다른 화신일 뿐입니다. 그들만의 욕심이며 그들만을 위한 욕망일 뿐입니다. 이를 권력욕이라고 합니다. 권력욕은 비단 정치에 국한된 단어가 아닙니다. 이러한 현혹은 우리에게 당장에는 대리만족을 줄 수 있을지 모르나 곧 우리를 자괴감에 빠트리고 낭패의 한숨을 쉬게 합니다. 현혹되어 속는 일은 참으로 바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존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우리네 절박한 인생이 생존이 아닌 축적과 축재, 여분과 여력의 삶을 즐기는 극소수의 현혹에 빠져 지금뿐 아니라 미래에까지 더 아프게 되는 건 아닐까 우려됩니다. 현혹은 결코 희망이 되지 못합니다. 지금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겐 그 어려움을 견뎠거나 그 어려움 속에서 깨달음을 얻은 실패자의 말 한마디가 더욱 귀감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