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두 사람의 가장 극적인 파국은 내가 12살 무렵의 어느 날 벌어졌다.
픽사베이
아버지가 가장으로서 돈을 벌기 시작한 것은 40대 중반부터다. 봉제공장에서 자투리 천을 가져다 크기와 종류에 따라 골라서 파는 일이었다. 일은 험하고 힘들었지만 수입은 제법 괜찮았던 모양이다. 낡고 작은 집이었지만 집도 마련하고, 트럭도 한 대 굴렸다. 아버지는 주머니가 불룩해지도록 돈다발을 넣고 다니기도 했다.
돈이 돌아도 우리 집은 늘 시끄러웠다. 아버지는 작은 봉제 공장들이 아니라 큰 공장을 뚫어야 한다 했다. 평생 이렇게 기레빠시(자투리)나 고르고 살 순 없으니 구청 직원도 만나고, 공장장 소개도 받고... 접대 아닌 접대가 이어졌고 늘 고스톱 판이 벌어졌다.
물품대금을 들고 나가 밤새 들어오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새파랗게 독이 오른 엄마는 새벽녘까지 온 동네 술집을 헤매고 다녔다. 늘 돈 때문에 싸웠다고 생각했지만 돈이 돌아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올해 77세가 되신 아버지가 신장 투석을 받기 시작한 지 15년이 넘어간다. 일주일에 삼일 네 시간씩 온몸의 피를 뺐다가 다시 넣는다. 나이 50이 넘어 다시 세탁소를 차렸던 아버지는 기어이 참지 못하고 반년 만에 문을 닫더니 택시 기사로 10년을 보냈다.
사납금도 못 채우는 일을 뭐 하러 하냐며 말렸지만 운전대만 잡으면 누구 참견도 듣지 않고 훨훨 돌아다니는 것이 좋았는지 맞교대를 10년 하시더니 병을 얻으셨다. 앙상한 팔에는 밧줄보다 굵은 혈관이 지나가고 새카맣게 변한 얼굴엔 예전의 보기 좋던 모습은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훨씬 자주 웃으시고 하루하루를 별일 없이 지내신다. 작은 방에서 혼자 티비를 보고 동네 공원에 가서 장기 두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한잔 걸치고 집에 와서는 소파에 누워 꾸벅꾸벅 존다. 엄마의 구박에도 노여워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늘 흔들리는 사람이었고, 여기에 없었으며 무엇인가를 쫓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엄마는 '번듯하게 보이고 싶어서...'라고 아빠의 허영을 정의했다. 비록 집안이 망해서 중학교도 진학을 못했지만 필체가 좋았던 사람, 인물이 훤하고 말수가 점잖은 사람, 그래서 늘 이런 일 하실 분 같지 않다는 얘기를 듣는 사람, 그래서 번듯하게 보이는 일을 하고 싶었던 사람. 엄마의 말을 듣고 나니 생각나는 장면이 있었다.
달력 뒷면이나 종이 여백에 가지런하고 빽빽하게 쓰여 있던 아버지의 글씨들. 가끔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배를 깔고 혼자 무언가 쓰고 있던 모습. 궁금해서 들여다 본 종이엔 신문의 헤드라인 한자들이 빼곡이 쓰여 있었다. 멋들어진 획들과 단정한 필체에서는 아무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무심코 던져버렸던 그 종이들에 아버지의 욕망이 줄줄이 누워 있었던 것이다.
60 고비를 넘기며 아버지의 몸에 들어 앉은 병은 아버지에게 위로와 평화를 가져다 준 것 같다. 끝없이 당신을 끌고다니던 번듯하게 보이고 싶은 헛된 욕망에서 놓여나서일까. 이제 글씨도 쓰지 않으신다.
중학교도 못나온 가난한 집 가장이 무슨 수로 번듯하게 살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누군들 번듯하게 살고 싶지 않겠는가. 너무 자주 남몰래 아버지의 부재를 꿈꿨던 나는 이제 그의 욕망이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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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살 무렵 대 파국, "엄마는 왜 저런 남자랑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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