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는 제안, 두 50대가 제주도로 떠난다

[오십 넘어 무전여행 ①]

등록 2017.03.21 14:23수정 2017.03.21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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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 나는 많이 아팠다.

겨울을 지나 매화나무 꽃망울이 몽울몽울 올라오기 시작할 무렵, 원인 모를 아픔의 씨앗들이 이곳 저곳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픔은 그 아픔 자체보다 슬그머니 따라 붙는 마음 속 흔들림 때문에 더 아프다. 그것도 천리타향이라면 그 아픔은 더 야리고 쓰리게 느껴진다. 작년 봄 나는 첫사랑 가슴앓이 하듯 그렇게 아팠다.


작은 피부병으로 시작한 병은 밤마다 불면의 시간으로 다가왔고 어느 날부터 무기력증이 퍼져 하루하루 버티기가 힘들어졌다. 사실 그 아픔이라는 게 마음에서 오는 병이라는 걸 나도 주변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병세가 점점 심해져 결국 친구들 도움을 받아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그 때 견디다 못해 심리상담을 하는 친구를 찾아갔다. 내 상태를 진단하더니 그 친구는 긴급 처방전을 주었다.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야?"
"음~ 글도 쓰고 싶고, 또 여행도 하고 싶고, 글쎄 잘 모르겠어."
"그럼 다른 것 다 집어 치우고 제일 하고 싶은 거부터 해."

친구의 처방은 기대보다 너무 싱겁고 간단했다. 다시 전주로 돌아가 골방에서 한참 나를 바라 보았다. 거울 속에는 총기 잃은 초로의 중년 사내가 서 있었다.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음 속에서 한 줄의 말이 떠올랐다.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 여행은 후에 가더라도 되든 안되든 글부터 먼저 써봐야겠다.'


그날부터 매일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곰도 사람이 될 수 있는 기간이니 100일 동안 쉬지 않고 쓰다 보면 무엇인가 보일 듯 했다. 블로그에 '홈즈의 하루'라는 방을 만들었다. 그렇게 100일 동안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쫓기듯 시작한 글쓰기는 100일을 넘어 160여일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마음은 평화를 되찾았고 토굴 같은 1평 전주 방에서 나와 다른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가을이 익어갈 무렵 중대 결단을 내려야 했다. 글을 쓰면서 나를 돌아보니 지금 현재 내 모습이 보였다. 내 몸에 잘 안 맞는 옷을 입고 있다는 생각에 미쳤다. 2년전 의욕적으로(?) 시작했던 국수장사를 접기로 했다. 그리 마음 먹으니 한결 더 편안해졌다.

함께 하는 동생과 상의하고 일단 혼자만이라도 전주생활을 정리하기로 했다. 홀로 계속 해야 할 동생을 생각하니 미안하고 불편했지만 그렇게 결정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자유로워졌다. 전주 방을 대충 정리해보니 4박스의 짐이 나왔다. 3박스의 책과 나머지는 옷가지다. 2년 전주 생활이 저 4박스 속에 들었다 생각하니 묘한 감정이 일었다.

전주를 대충 정리하고 고창 선운사에 들어 갔다. 그 곳에는 전주에서 만나게 된 벗 시도형이 살고 있었다. 스스로를 차요정이라고 불러 달라는 벗은 고창 선운사 차밭지기를 자처하며 지난 봄부터 선운사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관련기사 : 선운사에 가면 동백도 있고 야생차밭도 있다.)

차 정원(차 요정은 차 밭이라고 하지 말고 '차정원'이라 부른다) 가운데 있는 방에서 일주일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전에는 차정원 산책하고, 저녁부터는 차곡차곡(차 마시고 술 마시고)하며 놀았다.
늦가을 선운사 선운사에는 멋진 차정원(산책길)이 있다.
늦가을 선운사선운사에는 멋진 차정원(산책길)이 있다.전병호

선운사 차밭 거처 차정원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차요정 거처
선운사 차밭 거처차정원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차요정 거처전병호

차곡차곡 차마시고 술마시고
차곡차곡차마시고 술마시고전병호

돌아보니 그 동안 무엇 때문에 잘 되지도 않는 국수장사를 접지도 못하며 매달려 왔는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운사 깊은 계곡의 바람과 차정원의 신선한 기운을 받으며 뒹굴 거리다 보니 갑자기 제주도에 가고 싶어졌다. 며칠 전 제주에 사는 친구가 페북에서 스치듯 던진 말이 생각 났다.

'국수장사 접었다고? 잘 됐네.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좀 쉬었다 다른 일을 해도 해. 제주 한 번 놀러 와. 재워는 줄게.'

이 말과 함께 지난 봄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래 맞아! 나 올해 안에 여행 가기로 했었지.'

"형 나랑 제주도 밀감 따러 갈래?"
"그럴까."

뜬금없는 제안에 차요정은 일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 바로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그렇게 50대 초반, 두 철없는 친구의 제주도 무전여행은 시작되었다.
#선운사 #차밭 #50대 #무전여행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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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공작소장, 에세이스트, 춤꾼, 어제 보다 나은 오늘,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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