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프랑스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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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파리인가?" - 파리 계획안을 무시하는 이들에게 던진 르 코르뷔지에의 답
르 코르뷔지에는 당시로서는 아무도 생각지 않은 혁신적인 이런 도시 형태를 파리에 적용시키려고 했다. 지금도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파리 계획안'. 그가 이 계획을 세운 20세기 초반은 유럽의 대도시가 폭발적인 인구증가를 견디지 못할 때다. 더욱이 오래되어 위험한 중세시대의 조적건물과 좁고 무질서하게 짜인 도로들이 버티지 못할 위기에 처할 때였다.
더욱이 당시 파리는 도시의 급격한 팽창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근교도시 개발안 등을 세워내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던 시기. 르 코르뷔지에는 300만명이 거주할 만한 파리 시를 처음부터 다시 계획했다. 정 중심부에 수만명이 근무하는 사무용 건물 여러 개를 짓고, 시청과 박물관, 지금의 아파트의 기초나 다름없었던 빌라, 그리고 전원주택이 켜켜이 도시의 중심부를 감싸는 모습이었다.
20세기 초 나온 이 계획은 시대를 너무 앞서나간 나머지, 프랑스 건축계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300만명이 거주하게끔 만들어진 이 도시계획은 그대로 파기되고, 외곽부에 고층 건물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 현재의 파리 시의 모양새로 정비되었다. 과거에 얽매어 현재를 불편하게 하지 말자던 그의 말과는 정 반대의 모습이었다.
다행히도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마르세유 도시 재건에 참여하게 된다. 여기서 불후의 명작이자, 전 세계 아파트 건설의 현장 교과서나 다름없는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e d'Habitation) 단지를 건설한다. 내부에 쇼핑센터, 복층 거실, 옥상의 유치원과 놀이시설까지 배치한 이 건물은 당시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지금은 명실상부한 아파트의 기초가 되었다.
그가 계획한 도시 방식은 파리 시 대신 다양한 곳에서 사용되었다. 지금의 서울 재개발, 수도권의 신도시가 대표적이고, 인도의 찬디가르, 브라질의 부에노스아이레스나 알제리의 알제에서도 그의 바람에 맞는 방식의 도시 건설이 이루어졌다. 물론 르 코르뷔지에가 완벽하게 바라는 형태의 '이데아'는 만들어지지 못했지만, 지역에 맞는 모양새의 도시가 이루어졌으니 더 잘 된 일이었을 수도 있다.
르 코르뷔지에가 있었기에 '마이카 시대'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