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부를 점거한 학생들이 설치한 플랜카드.
본부점거본부
만 10년째 시흥캠퍼스 사업을 논의해온 '법인 서울대'의 본부는 시흥캠퍼스가 어떤 교육적 목적에서 필요한지, 거기서 누가 어떤 공부를 할 것인지, 운영비는 어디서 댈 것인지 여전히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키즈카페, 호텔, 실버타운 같은 수익사업에 관한 구상만 즐비하다.
아무도 서울캠퍼스와 동떨어진 시흥에서 학교를 다니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하지 않는다고 약속했던 의무기숙제도가 끈질기게 논의되고 있다. '레지덴셜 칼리지' 같은 세련된 이름으로 포장되지만, 쉽게 말해 '재수 나쁜 학생'들이 1학년이라거나 외국인이거나 특정 단과대 학생이라는 죄로 다른 학생들과 따로 떨어져 시흥에 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서울캠퍼스의 학생이 1학년 수업이나 영어강의, 혹은 시흥에 있는 단과대의 수업이 듣고 싶으면 서울에서 시흥까지 가야 한다. 여기에 시흥캠퍼스 주변에 아파트를 조성해 투기이익으로 건설비를 댄다는 계획이 발표되면서 사업 자체의 도덕적 정당성까지 훼손되었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포착한 학생들이 천막농성, 삭발, 단식까지 하면서 반대했지만 본부는 이를 싹 무시했다.
대체 필요성도 불확실한 캠퍼스를, 이렇게까지 무리해서 확장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 아마 별 이유가 필요없었을 것이다. 어떤 자본주의 기업도 수익성 있는 사업을 확장하는 데 이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서울대학교, 대한민국 학벌 카스트의 정점. 이름만 붙어도 권위가 생기고 돈이 나오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관악산의 공간적, 생태적 한계에 막혀 있는 관악캠퍼스 안에서만 굴려먹자니 어느 기업가라도 답답한 노릇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땅과 건물이 공짜로 생긴다면야 그야말로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이요,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기회가 아닌가.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서울대의 교수가 옥시 화학제품의 유해성, 유독성을 감추기 위해 보고서를 조작했던 것이 밝혀지면서 온 나라가 술렁였던 것이 불과 지난해였다. 자본과 학문의 결탁은 아주 쉽게 학문을 사회악으로 만든다. 대학이 수익사업에 의존할수록 연관된 기업의 목청은 커지고 학문의 자율성은 그만큼 줄어든다. 참과 거짓을 가르는 것보다 기업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중요해진다. 삼성 사업으로 예산을 대는 대학에서 반도체 공정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가능할까? 현대그룹의 산학협력에 운영비를 의존하는 대학의 교수가 현대차 비정규직 투쟁이나 유성기업, 동희오토의 쟁의행위에 대해 현대 사측에 비판적인 의견을 낼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법인 서울대'이고, 진리니 사회 정의니 인류의 진보 따위를 생각하는 것은 기업의 책무가 아니다. 법인 서울대에게 중요한 것은 정부와 산업계와 더 많은 관련을 맺어 더 많은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더 많은 명사들을 초빙하고, 더 멋진 건물들을 올리고, 대학 순위평가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것, 말하자면 서울대학교의 '브랜드 가치'(그리고 그와 함께 서울대학교 교수진과 졸업생, 재학생 모두의 몸값)를 올리는 것이다. 이것이 법인 서울대가 처음부터 내걸었던 목표이고 기치였다.
상처입은 '대학의 소명', 학생들은 변화를 위해 싸울 것고상한 척하지 말라고, 대학은 흙 파먹고 살라는 말이냐고 누군가는 반박할지 모른다. 틀린 말은 아니다. 연구를 지원하고 교수와 직원들의 생계비를 지급하는 일, 강의실을 유지·보수하고 컴퓨터며 소프트웨어를 구매하는 일, 장서를 관리하고 신간 서적을 들여놓는 일, 학술행사나 회의를 여는 일 같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기대하는 대학의 업무도 돈이 없으면 안 돌아가고 한국 정부는 고등교육에 돈을 쓰는 데 지극히 박하니까(대한민국의 고등교육 예산 비중은 OECD 최하위권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학이, 학문이, 지식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일말의 철학이라도 있다면 그러한 현실에 같이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육에 대한 사회적 투자를 늘리자고 사회를 설득하고 정부를 압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땅히 그렇지 않은가.
2017년 3월 11일, 법인 서울대는 학원 내 비폭력의 전통마저 벗어던짐으로써 완연히 기업으로서의 민낯을 드러냈다. 강의실 바깥에서 새처럼 찬바람에 떨던 대학의 소명은 이제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며 지면에 누워 있다. 현실은 스스로를 웅변하고 있고 나는 더할 말이 많지 않다. 그저 법인 서울대가 완성되었음을 축하하고, 우리가 사는 현실을 애도하고, 싸우고 있는 학생들에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지지와 연대를 보낼 따름이다.
법인 서울대의 경영자 여러분이 이것만은 새겨들었으면 한다. 어떤 폭력과 기만도 인간성과 정의를 부르는 목소리를 영원히 잠재울 수 없다. 이윤 앞에서 하찮게 내던져지고 있는, 그러나 인간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가치와 요구들이 언젠가는 이윤을 중심에서 밀어내고 자기 몫을 찾고 말 것이다. 지금 당신들과 싸우고 있는 학생들이 바로 그 변화를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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