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작품 설명애급(이집트), 법란사(프랑스)라고 해줘야 이해에 도움이 될 듯
이윤옥
사실 춘원이 친일파로 확 돌아서기 전까지인 1938(46살)년 까지만 해도 그는 꽤 괜찮은 작품들을 써서 '문학의 거장 '소리를 들을 만했다. 어디 그뿐인가! 와세다대학을 나온 인텔리로써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하이로 건너가 도산 안창호와 더불어 독립운동을 한 것까지는 손뼉을 받을 만한 일이다.
이광수의 친일행각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계기는 정신적 스승인 도산 안창호가 1938년 3월 10일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고문 끝에 죽고 나서부터로 보는 견해가 크다. 그러나 그는 이미 1922년 5월 <민족개조론>이란 글에서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는 민족 간의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며 이기적이고 나약한 겁쟁이인 조선 민중은 엘리트 집단에 복종하고 봉사해야 한다"는 글에서 친일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음을 내비친 바 있다.
"자 조선의 동포들아 / 우리들이 있음으로써 / 이 큰싸움을 이기게 하자 /우리들이 있음으로써 / 대 아세아 건설을 완수하자 / 이럼으로써 비로소 / 큰 은혜에 보답하여 받듦이 되리라 / 아아 조선의 동포들아 / 우리 모든 물건을 바치자 / 우리 모든 땀을 받치자 / 우리 모든 피를 바치자 / 동포야 우리들, 무엇을 아끼랴 / 내 생명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지 말지어다 / 내 생명 그것조차 바쳐 올리자 / 우리 임금님(일본 천황)께"이는 춘원 이광수가 일본 천황을 위해 지은 <모두 바치리>란 시 가운데 일부다. 그는 1945년 1월 18일치 <매일신보>에 이 시를 발표했으며 이보다 앞서 1월 17일에는 전쟁협력단체인 대화동맹(大和同盟)이 주도한 <처우감사총궐기전조선대회>에서 절규에 찬 목소리로 이 시를 낭송했다.(친일인명사전, 제 2권, p744-755)
기자에게 이광수의 친일 행각 중 가장 으뜸을 꼽으라면 가야마 미츠로((香山光郞, 또는 香山光浪 )라고 창씨개명을 하면서 늘어놓은 궤변을 들고 싶다. 1940년 4월 11일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이 이름을 바꾸도록 이른바 창씨개명을 단행했다. 그날 아침 총독부 관리들이 문을 여는 시각을 기다려 가장 먼저 달려가 등록을 마친 사람은 이광수였다. 그의 입을 통해 창씨개명 이유를 들어보자.
"내가 향산(香山)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改)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어명과 독법(讀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香山光浪)이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내선일체(內鮮一體)를 국가가 조선인에게 허(許)였다. 이에 내선일체 운동을 할 자는 기실 조선인이다. 조선인이 내지인(일본인)과 차별 없이 될 것 밖에 바랄 것이 무엇이 있는가. 따라서 차별을 제거하기 위하여서 온갖 노력을 할 것밖에 더 중대하고 긴급한 일이 어디 또 있는가. 성명 3자를 고치는 것도 그 노력 중의 하나라면 아낄 것이 무엇인가. 기쁘게 할 것 아닌가. 나는 이러한 신념으로 향산이라는 씨를 창설했다(뒷줄임)" -'창씨와 나' <매일신보> 1940. 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