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에게 수영을 배우는 샤이론
<문라이트>
"어릴 때 지나가는 할머니가 불러 세우더니 그랬어. 뛰어다니며 달빛을 잡으려고 하는구나, 달빛을 받으면 검은 아이들은 파랗게 보여, 파랗게. 그러니까 널 이렇게 부를게, '블루'" "아저씨 이름은 블루인가요?""아니... 때가 되면 스스로 뭐가 될지 정해야 해. 그 결정을 다른 사람이 할 순 없어."후안과 샤이론이 나누는 이 대화가 바로 영화 <문라이트>가 닿으려고 하는 종착점이자 샤이론이 염원하는 모든 것이다. 하지만 소수자라면 더욱 더, 소수자라서 더욱 더 그 결정은 힘든 일이다. 흑인, 빈곤 가정에 게이여서 받는 모든 폭력과 차별들에서 어떻게 한 명의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래서 2부 '샤이론'에서도 샤이론은 역시 침묵할 뿐이다.
고등학생이 되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더 심각한 마약중독자가 되었고, 친구들은 여전히 그를 호모라고 괴롭히며, 그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어른이던 후안은 죽었다. 물에서 위안을 얻는 물의 아이 샤이론은 바닷가 앞에서 유일한 친구인 케빈과 마주친다. 그를 블랙이라고 부르는 친구이며 그가 숨겨온, 몽정의 대상이다.
"나는 가끔씩 내 눈물에 휩쓸려서 내가 그대로 물이 되어버릴 것 같아."처음으로 터놓고 속 얘기를 하던 그들은 이내, 성적인 경험을 나눈다. 샤이론에겐 살면서 처음 느낀, 희열로 가득찬 격렬한 몸의 떨림이다. 물을 좋아하는 샤이론에게, 그럼 자신이 불을 알려주겠다고 말한 케빈은 말 그대로 샤이론의 마음 속에 불꽃을 만들어 놓는다. 하지만 그의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친구들은 여전히 그를 리틀이라 부르며 괴롭히고, 케빈마저 그를 배신한다.
3부 '블랙'에서 샤이론은 어른이 되어있다. 그것도 침묵으로 일관하던, 불안한 눈빛의 비쩍 마른 소년과는 다르게, 근육질에 사람들에게 위협을 가할 줄도 아는 거친 마약상이 되어있다. 케빈의 배신 이후 소년원에 들어가 새로운 사람, 거친 사람이 되어 나온 샤이론은 그래서 성장한 걸까?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를 숨기며 살던 그는 늦은 밤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케빈의 전화다. 불을 다루는 요리사가 된 케빈은, 자신이 일하는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한 곡의 노래 때문에 그가 생각났다는 말을 한다. 그 전화 한 통에 샤이론은 흔들린다. 이 영화가 로맨틱한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은 생각보다 크게 성장하지 못한다. 나이를 먹는다고 절로 성장하는 것도 아니다. 샤이론은 소수자로서 받는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결정을 했지만, 이 결정은 오히려 더 그를 꽁꽁 싸맬 뿐이다. 그래서 이 결정 또한, 사회가 준 강압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변화시키는 힘은 역시 사랑이다. 케빈의 전화를 받은 그는 그날 밤 몽정을 한다. 그 옛날 블랙이라 불리던 그 시절처럼. 사랑은 아래부터 시작해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것이라는 노래 가사도 있지 않나.
감독이 '왕가위 키즈'임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도 3부에서다. 그에게 전화를 걸고 담배를 피는 케빈을 찍는 몽환적인 화면에서부터 로맨틱한 기운이 시작되어 샤이론이 케빈을 만나기 위해 주를 가로질러 운전을 하는 장면에서 흐르는 꾸꾸루꾸꾸 팔로마(Cu Cu Rru Cu Paloma)는 생각지 못한 충격이며, 그래서 더 강렬하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그리고 케빈을 향해가는 샤이론의 자동차를 따라가던 화면은 이내 달빛 아래 파랗게 흔들리며 뛰노는 흑인 아이들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