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원과 그의 외증조부 이종만
오마이뉴스
그런데 이종만에 대한 평가가 여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 친일파였다는 점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점만으로도 큰 죄악을 저지른 사람이다. 하지만, 친일파였다는 점과 더불어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까지 검토해야만 그에 대한 평가가 완성된다.
한 인간을 평가할 때는 인생을 전체적으로 살펴야 한다. 민족에 대해 죄를 범했는지 공을 세웠는지를 판단할 때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각 단계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명이 응칠이었던 안중근은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에 따르면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진압군에 가담해 동학군과 대립했다. 당시 나이는 열여섯 살이었지만, 지역유지의 아들이라는 점과 총을 잘 쏜다는 점에 힘입어 황해도 의용군의 수뇌급이 되어 진압에 참여했다.
반외세·반봉건 투쟁인 동학농민혁명을 반대하고 진압한 것은 인생의 오점이 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중근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이전 행적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일이 그 뒤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안중근은 일본 침략정책의 선봉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쓰러뜨렸다. 그래서 우리는 앞의 오점이 아닌 뒤의 업적을 근거로 그를 평가하고 존경한다. 우리는 안중근의 인생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그 같은 판단을 내린다.
이승만은 독립운동 지도자로 활약하고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재직했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한국 독립운동을 대표했다. 이 과정에서 문제가 많기는 했지만, 그 역시 독립운동에 기여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대다수 한국인들은 독립운동 경력을 근거로 이승만을 평가하지 않는다. 이전 행적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죄악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1945년 해방 뒤에 통일정부 수립을 방해하고 분단을 획책했다. 또 장기독재를 위해 불법 개헌을 하고 헌정을 농단했다. 또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억압했다. 막판에는 3·15 부정선거를 저질러 4·19 혁명을 자초했다. 그 뒤 국민의 심판도 받지 않고 이른 아침에 하와이로 도주했다.
우리는 그 같은 인생 후반부 행적에 좀더 강조점을 두고 이승만을 평가한다. 그러면서도 1945년 이전의 행적을 약간씩은 참고한다. 이처럼 우리는 이승만의 인생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그를 판단하고 있다.
이종만도 그런 종합적 판단을 받아야 한다. 그의 경우에도, 인생 앞부분과 뒷부분이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1945년 60세 나이로 해방을 맞이하면서부터 그는 친일파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한국 현대사의 핵심 쟁점인 분단 문제와 관련해서 그는 이전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해방 이후에 분단을 획책하거나 조장한 일은 해방 이전에 친일을 한 것 못지않게 중대한 죄악이다. 마찬가지로, 분단을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지지한 것은 해방 이전에 독립운동을 한 것만큼 훌륭한 일이다.
이종만이 바로 그랬다. 친일파로 살았던 그가 해방 뒤에는 분단을 저지하고 통일을 추구하는 쪽에 힘을 보탰다. 해방 뒤에 그는 <독립신보>를 간행하고 남북협상을 적극 지지했다. 분단을 획책하는 이승만에 맞서 김구·김규식이 벌인 남북협상과 통일운동의 편에 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