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말하는 페미니스트 피하는 법'이라는 영상은 페미니스트를 낙인찍고 혐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진은 영상 중 캡처
유튜브 영상 캡처
그들의 '확증편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영상 속에서 드러나는 경험적 재단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설득력있게 느껴질 것이다. 그 이유는 영원히 인터넷을 밈(인터넷상에 재미난 말을 적어 넣어서 다시 포스팅 한 그림이나 사진)으로 떠돌아다니는 '메갈 인증 캡처'나 구글에 Feminist meme라고만 쳐도 와르르 나오는 'ugly'라는 글자들과 연관되어 있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페미니즘에 대한, 무엇보다 페미니스트 여성에 대한 중요한 마타도어는 '사랑을 못 받아서'로 시작했다. 이것은 자신들이 '상식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다정하고도 우려 가득한 분석이기도 하다. '애인 하나 없을 것'이라는 이상한 조소는 일베에게도 적용되는 규칙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의 '상식'과 어긋나는 주장을 할 때마다 딱하다는 말투로 말한다.
"너희가 사랑을 못 받아서..."
이 주장은 때로는 다른 형태로 발화되기도 한다. "사랑받는 여성은 자신이 받는 차별에 대해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이를테면 1월 초에 여성신문에 실린 '페미니즘이 싫다는 젊은 누이께' 같은 글에서 드러나는 정서다. "뭇 남성들이 떠받드는 젊은 여성"은 "여성차별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부분을 읽으며 착잡했다. 젊은 시기를 살아가는 여성들은 "뭇 남성들이 떠받드는" 문제를 결코 행복하게 여기지 않는다. 섹슈얼리티 문제에 집중하는 "젊은 여성"들은, 그들의 '젊은' 섹슈얼리티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양상을 밀접하게 느낀다.
'페미니스트는 못생겼다', '사랑받지 못해서 이러는 것이다'는 주장과 이 문장을 함께 언급하면 이 글을 쓴 사람은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는 여성이 '성적 대상'으로서 가장 높게 '평가'되는 시기가 지나가면 다른 종류의 억압이 실질적 문제로 다가온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장 속에는 페미니즘적인 주장 뒤에도 숨을 수 있을 만큼 "사랑받지 못해서"의 이데올로기가 강력하게 작동한다는 사실도 들어 있었다.
1960년대 초, 여성 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플레이보이 클럽에 위장취업해서 폭로기사를 썼을 때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플레이보이 바니걸들이 받는 정당하지 못한 보수, 노동 착취, 매춘 강요에 대해서만 놀란 것은 아니었다. 페미니스트가 '바니걸'로 취직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사람들은 왈가왈부했다.
"페미니스트가 미인일 수 있다니."물론 그 사건이 있었다고 해서 페미니스트가 '못생겼다'는 사람들의 편견이 사라진 건 아니다. 플레이보이지는 오히려 스타이넘의 사진을 잡지에 넣어서 바니걸로 취업하라고 광고를 해댔다. 그러나 그녀가 '페미니스트의 외모'에 대한 대중적 인식에 낸 균열은 그 이후에도 계속 중요한 문제로 남았다. 지금도 저런 영상이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편견으로 된 안경을 확고하게 장착하고 세상을 본다면 저 주장이 틀릴 확률이 실제로 낮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확증편향이라는 것은 이런 사안에서는 아주 광범위하게 작동할 수 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형화된 외모'에 가까워지기 위해서 그다지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 확증편향을 공고히 하는 데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자신이 내키는대로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체중 문제에 연연하지 않는 여성들이라면 저 바운더리에 속할 확률이 어느 정도는 높아진다.
이 여성들에게 '못생겼다'는 놀림은 별다른 상처를 주지 못한다. 당연히 그 기준이 그들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이 일정한 방식으로 아름다워야만 한다는 당위는 이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 힘도 없다. '못생겼다'는 것을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놀림거리로 삼는 사람들에게 분노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페미니스트에게 있어 '아름다움'이란 아름다움 그 자체보다는 누가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끼느냐의 문제다. 미감은 주관적이라고 생각되기 쉽지만, 실제로 미감을 느끼는 시선은 그 존재가 어떻게 '통제되고 있는지'를 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