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원수(윤다훈 분).
SBS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간행한 <한국 구비문학 대계>라는 방대한 서적이 있다. 전국 곳곳에 전해지는 설화들을 일일이 채록한 기록물이다. 이 책에는 바보 신부나 바보 며느리에 관한 이야기는 잘 안 나오고, 바보 신랑이나 바보 사위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나온다.
이것은 우리 머릿속에 입력된 경험법칙과도 부합한다. 모자란 아내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모자란 남편에 관한 이야기가 대중적인 문학작품에 더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우리 머릿속에서도 바보 신부보다는 바보 신랑 이야기가 좀더 친숙하다.
<한국 구비문학 대계>에 수록된 바보 신랑, 바보 사위에 관한 이야기는 젊은 신랑이 처가에 가서 실수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처갓집 위치를 까먹는다거나, 처갓집 밥상에 놓인 음식을 먹는 방법을 모른다거나, 처갓집 주방에 몰래 들어가 음식을 먹었다가 창피를 당하는 남자들의 이야기가 많다.
경북 영덕군 달산면에서 수집된 설화에는 처갓집 위치를 잊어버려 곤혹을 치르는 바보 사위가 나온다. 처갓집 동네 이름은 염통골이었다. 목적지가 염통골이란 말을 듣고, 그는 소의 염통을 연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처갓집 인근까지 갔다가 동네 이름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초조해 하던 중에, 논일하는 농부를 발견했다. 그 농부는 소를 이용해서 일하고 있었다.
동네 이름이 소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낸 사위는 농부한테 고함을 쳤다. "그 소 안에 뭐 들었소?" 농부는 황당하다는 말투로 "헛, 그 양반, 소 안에 창자 들었지, 뭐 별 거 들었겠소?"라고 내뱉었다. '창자? 그런 이름은 아니었는데'라는 생각에 사위는 다시 질문했다.
"아니, 창자 말고 뭐 들었소?" "간이 들었지.""거 참, 간 말고 또 뭐 들었소?" "허파 들었지.""그거 말고!""그거 말고? 아! 염통 들었지.""옳거니! 염통골이다."강원도 횡성군 공근면에서는 또 다른 바보 사위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사위는 먹는 것 때문에 처가 쪽 사람들의 웃음을 샀다. 콩을 껍질째 먹거나 송편을 알맹이만 먹는 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것이다. 충북 영동군 학산면에서 바보 사위로 전해지는 남자도 먹는 것 때문에 실수했다. 그는 홍시를 몰랐다는 이유로 이곳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그래서 이들은 바보로 소문나게 되었다.
전통적 결혼문화와 관련 있는 바보 남자들의 등장이렇게 결혼 문화에 관한 설화에 바보 남자들이 등장하는 것은 전통적인 결혼문화와 관련이 있다. 유림세력이 지방 곳곳에 성리학 이념과 향약을 보급한 16세기 전반까지도 우리나라 결혼 생활은 데릴사위제도로 이루어졌다. 신부와 신랑이 처갓집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몇 년 동안 처갓집에 기거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신랑이 처갓집에서 일을 해줘야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심한 경우에는, 평생 동안 처갓집에서 일하는 신랑들도 적지 않았다.
16세기부터 유학자들이 이 제도를 없애려고 노력했고 또 상당한 성과를 거뒀지만, 이것은 조선 후기까지도 생명력을 이어나갔다. 이렇게 오래도록 유지된 데릴사위 문화가 바보 신랑이나 바보 사위의 설화를 생산한 최대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지역 간의 문화적 차이가 오늘날보다 훨씬 더 컸던 시대에, 객지 타향으로 장가가는 남자는 현지 문화에 낯설 수밖에 없었다. 처갓집 동네의 지명과 음식 문화를 포함한 모든 것이 낯설 수밖에 없었다. 그 지역의 사투리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전국 각지의 특산품을 쉽게 맛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았던 옛날에는 송편이나 홍시 맛을 못 본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안 그래도 긴장이 바짝 들었을 새신랑이 처갓집에서 이런 음식을 처음 구경한다면, 현지인들의 눈에 재미있는 광경이 연출되기 쉬었을 것이다. 낯선 음식이나 상황 앞에서 당황해 하고 실수하는 모습이 현지인들한테는 바보의 모습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모습에 과장을 보태서 위와 같은 설화들을 생산했을 것이다.
사임당 남편도 그런 경우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