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
MBC
소설 <홍길동전>에서 주인공은 국내 활동을 청산하고 남쪽 율도국에서 제2의 길을 모색한다. 그 대목은 이러하다.
"남쪽에 율도국이란 나라가 있는데, 기름진 평야가 수천 리나 되어 실로 살기 좋은 나라이고, 길동이 마음속으로 늘 그리던 곳이었다. 모든 사람들을 불러 당부하기를 '내가 이제 율도국을 치고자 하니, 그대들은 최선을 다하라'라고 하고는 그날 군대를 이끌고 떠났다."
흔히 TV 사극 첫 장면에는 "이 드라마는 역사를 바탕으로 창작된 작품입니다"라는 식의 문구가 나온다. 허균의 <홍길동전>도 역사를 소재로 창작된 작품이다. <연산군일기>와 <중종실록>에 등장하는 반체제 혁명가 홍길동을 다룬 작품이다.
실제 사실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작가 허균은 상상력을 펼치면서도 실존인물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홍길동이 고위층 가문의 얼자(노비 첩의 아들)로서 서자(자유인 첩의 아들)보다 더한 차별을 받았다는 점, 홍길동이 세상에 저항했다는 점은 사실 그대로 유지했다. 혁명가 홍길동을 의적 홍길동으로 바꾸긴 했지만, 세상에 저항한 반항아였다는 점에서는 의적이나 혁명가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여기에 더해, 허균은 홍길동이 해외에서 나라를 세웠을 가능성까지 <홍길동전>에서 그대로 유지했다. 홍길동이 체포된 뒤 남쪽 섬나라로 망명해 제2의 인생을 시작했을 가능성까지 자기 소설에 그대로 담은 것이다.
체포된 홍길동은 어떻게 되었을까연산군 시대 역사서인 <연산군일기>에는 1500년에 홍길동이 체포됐다는 기록만 나올 뿐, 그 뒤 어떻게 됐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홍길동에게 협력한 지방 유지들이나 중앙 고관이 어떻게 처벌됐다는 기록은 나오는데, 정작 주모자인 홍길동이 어떻게 처벌됐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홍길동은 1500년에 체포됐다가, 기록상으로 1500년에 사라진 사람이 된다.
<홍길동전>에는 홍길동이 임금의 회유를 받고 병조판서 자리를 받은 뒤 해외로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어쩌면 이것은 실제 사실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일지도 모른다. 홍길동의 협력자들이 처벌됐다는 기록은 있는 데 반해 주모자인 그가 어떻게 됐다는 기록은 없으니, 형사처벌을 피하고 해외 망명을 떠났을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은 것이다. 어쩌면, 체포된 뒤에 탈옥을 했을 수도 있다.
조선 후기에 나온 <해동이적>이란 책이 있다. 문신 겸 학자인 홍만종이 유명 기인들의 이야기를 정리한 책이다. 이 책에서 홍만종은 뜻을 이루지 못한 홍길동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도망가 버렸다"면서 "필시 해외로 도망가서 왕이 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 추정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이 일본열도와 대만(타이완)의 중간 해역인 오키나와열도에 남아 있다. 국문학자 설성경의 연구서인 <홍길동의 삶과 홍길동전>에 따르면, 오키나와열도의 역사기록인 <구양>이나 <팔중산유래기> 등에는 한자로 홍가왕(洪家王), 현지 언어로 '홍가와라'로 불리는 인물이 등장한다. 홍가왕은 다른 말로 홍씨왕이다.
홍가왕은 열도 최남단의 작은 섬에서 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홍가왕은 홍길동과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오키나와에 망명한 홍길동이 현지에 정착할 목적으로 출생지를 조작했을 가능성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홍가왕이 오키나와서 활동 개시한 시점은 1500년경홍가왕이 오키나와에서 본격적 활동을 개시한 시점은 1500년경이다. 조선에서 홍길동이 체포됐다가 기록에서 사라진 1500년 무렵에 홍가왕이 이곳에서 활동을 본격화했던 것이다. 이 점은 홍가왕이 홍길동과 동일인일 가능성에 무게를 더해준다. 거기다가 홍가왕은 봉건체제 해체를 주장하고 백성들의 권익 증진을 추구했다. 이 점 역시 혁명가 홍길동의 궤적과 일치한다.
홍길동이 섬나라 오키나와에서 왕이 됐을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해동이적>에 따르면, 명나라를 방문한 어느 조선 사신이 그곳에서 희한한 정보를 얻어왔다. 명나라 황제에게 친서를 보낸 섬나라 왕의 성씨가 홍길동과 관련이 있다는 정보였다.
공(共) 밑에 물 수(水)가 있는 글자가 그 나라 왕의 성씨였다. 물 수(水) 즉 수(氵)가 共의 왼쪽에 있으면 홍(洪)이 된다. 홍만종은 홍길동이 해외로 간 뒤 자기 성씨를 그렇게 바꿨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한글 사용자들은 글자의 초성·중성·종성의 위치를 바꿔 쓰지 않는다. 하지만, 옛날 한문 사용자들 중에는 글자 구성요소의 위치를 바꿔 쓰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일례로, '생략'이란 글자에 들어가는 약(略)자를 약(畧)으로 표기하는 예도 있었다. 왼쪽의 밭 전(田)을 위쪽으로 옮겨 쓰기도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도 한자 사용자들은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물 '수'를 '공'의 왼쪽이 아닌 아래쪽에 둔다 해도, 옛날 사람들은 그게 홍씨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봉건체제에 저항하고 백성 민권 위해 싸웠다는 홍가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