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 연쇄 자살 징조는 2003년 11월 11일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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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유명인이 아니더라도 충격적인 자살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 비슷한 형식의 자살이 늘어난다. 일명 베르테르 효과다. 특별히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다른 선택이 없다고 생각하면 앞서 자살한 사람의 선택을 따라 하는 모방 자살은 이주노동자와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다.
이주노동자 연쇄 자살 징조는 2003년 11월 11일에 나타났다. 스리랑카 출신 이주노동자 다라카(32)씨가 당일 오후 8시 45분쯤 지하철 8호선의 한 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날이다. 고인은 사고 직후 곧바로 성남중앙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었다.
시신이 영안실에 안치되고 얼마 안 있어 성남에서 이주노동자 지원 활동을 하던 지인이 소식을 전해왔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다라카가 자살했다고 말했다. 더불어 "유품과 자살 동기를 살필 수 있는 단서가 될 만한 것을 빨리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부랴부랴 스리랑카인 두 명과 함께 경기 광주 초월에 있는 천막공장으로 향했다. 다라카가 살았던 아래층이 없는 2층 컨테이너 숙소는 온기라곤 느낄 수 없었다. 대로변에 위치해 있어서 차량이 지나갈 때마다 지축이 흔들렸고 휑한 느낌이 더해졌다. 사람이 살았었다는 흔적이라곤 방바닥과 손이 닿는 곳마다 한두 장씩 널려 있는 선불제 전화카드가 전부였다. 수십 장이 넘는 전화카드는 그가 얼마나 자주 고향에 전화했는지 가늠하게 했다.
동행했던 스리랑카인은 언제나 유쾌했고 사람들을 잘 챙겨줬던 다라카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며 그에 대해 알려주었다. 다라카는 장성 출신의 아버지를 두었지만 군인의 길을 마다했다. 스리랑카 인기 스포츠인 크리켓 선수로 5년을 활동했던 다라카는 아버지 후광이 아니라 스스로 삶을 개척하고 싶어 했다. 크리켓 선수 생활을 마쳤을 때 아버지가 억지로 군에 집어넣었지만, 그는 아버지 몰래 한국으로 향했다. 이주노동이 탈영이 된 셈이었다. 그때 나이가 25살이었다.
한국에서 그는 운동선수 특유의 성실함으로 사장에게 늘 인정을 받았다. 그 덕택에 회사에서는 그가 추천한 스리랑카 사람들로 직원이 채워졌다. 하루 12시간이 넘게 일했던 다라카는 월급의 70~80퍼센트를 부모에게 송금했다. 가끔 주말에 즐기는 크리켓은 유일한 취미이자 그리움을 달래는 방법이었다.
숙소에서 다라카의 죽음을 예견할 만한 단서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자살 원인은 금세 확인되었다. 다라카의 매형과 직장 동료들 그리고 회사 사장은 그간 사정을 세세하게 설명했다.
다라카는 자살하기 전날까지 천막공장에서만 4년 넘게 별문제 없이 일하고 있었다. 문제는 정부가 미등록 이주노동자 선별적 합법화 정책을 시작하면서 불거졌다. 당시 정부는 4년 미만 체류자에 대해서는 고용주의 확인을 거쳐 취업을 허락해 줬다. 반면, 4년 이상 체류자는 출국하지 않을 경우 11월 16일부터 강력한 단속에 나서겠다고 천명했다.
선별적 합법화 조치로 다라카가 일하던 천막공장에서는 두 명의 스리랑카인만이 체류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동료 스리랑카인들을 가르치며 가장 오래 일했던 다라카는 합법체류 신고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낙담했다. 사장은 다라카에게 "단속이야 늘 있는 일이고, 한두 달만 지나면 예전 같아질 테니까 피했다 오라"며 상여금을 주고 휴직을 권했다. 하지만 정부가 일제 단속을 천명한 날짜가 다가올수록 불안해하던 다라카는 결국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고 말았다.
이주노동자들은 왜 베르테르 효과를 겪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