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를 업고어떻게든 글을 쓰고 싶었던 시절.
정가람
여행, 영화와 관련된 기사도 쓸 수 없는 상황. 그럼 난 뭘 쓰지? 이때 눈에 들어온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우리네 삶처럼 정치적인 영역이 또 있을까? 모든 것은 정치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 평소 나의 지론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영화나 여행 대신 생활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포털에는 '이게 수필이냐', '신변잡기는 일기장에 쓰라'는 악플들이 달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결국 일상에서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시민기자가 상근기자와 다른 점이었다.
이후 나는 편집부가 가끔 원고 청탁을 하는 시민기자가 되었다. 글을 얼마나 잘 쓰느냐와 별개로, 얼마 되지 않는 30대 회사원이라는 희소성 때문인 듯했다. 나는 삼겹살 값이 오르면 회식하기 힘들다고 썼으며, 전셋값이 오르면 이를 방치하고 있는 국가의 문제점을 지목했다. 나의 기사는 일반인의 시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고, 때로는 현실의 변화를 추동하기도 했다. 짜릿했다. 이렇게나마 내가 사회를 바꾸는 데 일조한다는 사실이 고무적이었다.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기사쓰기를 많이 권유하고 다녔다. 사회가 좀 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나와 같은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더 많이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언론의 '오래된 미래'라고 믿었다. 아내도 나의 설득으로 기사를 쓰기 시작했는데, 현재 우리 부부는 육아일기를 통해 좀 더 많은 이들과 소통하려 노력 중이다. 글을 통해 함께 육아를 고민하고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고자 하고 있다.
시민기자 10년의 힘그런데 며칠 전 부산의 대학교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으레 그러려니 했을 테지만 유독 그 제안에 신경이 쓰였던 것은 1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 때문이었다. 오롯이 30대를 시민기자라는 별칭과 함께 했던 바로 그 시간.
사실 사회의 어느 분야든 10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사람이 무엇을 하든 간에 10년이면 그 분야의 장인은 못 되더라도 최소한 전문가라는 소리는 들을 수 있기 마련이다. 실제로 대학에 남은 나의 동기들은 북한전문가가 되어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대학원 졸업 뒤 취업했던 물류 기업의 동기들은 지금 그 조직의 과장, 차장급이 되어 회사를 지탱하고 있다.
그렇다면 난 북한 전문가나 물류 전문가가 되는 대신 무엇을 택한 것일까? 물론 지금이야 사회적경제 분야에 몸담고 있지만, 아직 채 4년 밖에 되지 않았으니 어디 가서 명함을 내밀 수준은 못 된다. 과연 나는 10년 동안 무엇을 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