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 '행복사회'의 대안을 찾으라 떠난 EU농촌공동체연수 중, 독일 하이델베르크 카를 테어도르 다리 위에서..
정기석
<오래된 미래마을>에서 <마을시민으로 사는 법>을 귀농한 첫 농촌마을은 진안의 산골마을이었다. 무주, 진안, 장수가 서로 만나는 곳이어서 '무진장 지역공동체 네트워크'를 꾸려보려는 야심 찬 사업계획을 세웠다. 일과 삶이 하나되는 생태공동체마을을 염원하던 아홉 사람이 의기투합해 공동 귀농을 한 것이다.
사업기획자, 도시디자이너, 농촌계획가, 환경연구원, 웹프로그래머, 출판편집자, 대안교육자 등 인적 구성이 다채로웠다. 이만하면 각자 도시의 학교와 회사에서 갈고 닦은 이런 특기와 경험을 살려 마을공동체와 지역사회의 재생과 지속가능한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일은 마음 먹은 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한 달쯤 지나면서 마을이 낯설고 마을사람들의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왜 마을에 내려왔는지" 이유와 목적이 잘 정리되지 않았다. 마을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할 준비가 너무 부족했음을 깨달았다. 마을과 지역사회도 느닷없이 마을로 쳐들어온 도시난민들을 받아줄 준비가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우리 아홉 사람 모두 서로를 돌보고 보살필 역량과 품성이 모자랐다. 3개월여 만에 매월 30만 원씩 나누던 생활비가 바닥나자 선택의 여지마저 사라졌다. '생태공동체마을 건설 패거리 풀씨네'라는 이름의 공동귀농연습단은 예정된 실패를 깨끗이 인정하고 해산했다. 첫 책 <오래된 미래마을>에 그때, 그 마을에서 겪고 느낀 일상과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공동귀농 실패로 낙담은 했으나 좌절하지는 않았다. 새로, 다시 시작했다. 대열에서 흩어져 혼자 지리산 자락의 산골마을을 찾아 깃들었다. '고향이 가까울 것, 지리산 자락일 것'. 평소 정해둔 귀농 적지를 결정하는 2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산청의 웅석봉 아랫마을이었다. 보증금 없이 월세 5만 원에 1백 년이 넘었다는 빈 농가를 구했다. 시가 10억 원의 행복감을 주는 생태적인 집이었다. 그래서 당호를 '십억재'로 명명했다. 하지만 농사지을 땅, 농사짓는 기술 등 먹고 살 준비는 여전히 되지 않은 불안한 상태였다.
그런데 지리산 자락에서는 '도시 월급쟁이 특기자'가 먹고살만 한 일거리를 찾기 어려웠다. 배후도시 진주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먹고는 살겠지'라는 근거없는 낙관론이 흔들려 몹시 당황했다. 길거리 생활정보지에는 생활정보가 드물었다. 인터넷을 뒤져 겨우 서울에서 남의 글과 책을 대신 써주는 '유령작가' 일을 찾았다.
하지만 "더도 덜도 말고 한달에 100만 원만, 아니 50만 원만 벌었으면…" 하는 소박한 욕심은 채워지지 않았다. 무명작가, 또는 유령작가로서 글 쓰고 책 짓는 일은 안정된 수입을 보장하지 않았다. 대필노동의 단가를 높여보려 지방문예지의 하류시인으로 등단하는 무리수까지 두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농사를 짓든, 농사를 짓지 않든 귀농해서 먹고 사는 일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때 볕이 잘 드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심각하고 절박하게 궁리하고 연구했다. '농사를 짓지 않고도 마을에서 먹고 살 수 있는 방법', 이른바 <마을시민으로 사는 법>을. 결국 이런 결론에 다다랐다.
"농사짓는 농부만 사는 곳은 농촌이나 마을이 아니고 농장의 꼴이 아닌가. 모름이지 농촌이 마을이려면 농부의 육신이 다치거나 아프면 고쳐줄 마을의사도 있어야 하고, 농부의 마음이 힘들면 치유해줄 마을성직자도 있어야 한다. 농부가 아이를 낳으면 공부와 기술을 가르치는 마을선생도 있어야 한다. 먹고 살아야 하니 경제, 문화, 교육, 생태 분야 등 다종다양한 업종과 직종의 '마을월급쟁이'와 '마을자영업자'들도 공생해야 마을이다. 그래야 비로소 농촌은 마을공동체라 할 수 있고, 마침내 삶과 일과 놀이가 하나 되는 우주 같은 대동사회가 될 것 아니겠는가. 안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