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연세대학교 SNS 페이지에 올라온 게시글. '연세대 응원가'라고 소개된 노래의 가사 중 "이대한테 차이고 숙대한테 차이고"라는 부분이 있어 비판이 제기됐다.
연세대학교 페이스북
며칠 전, 연세대학교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에 한 동영상이 올라왔다. 연대 새내기들에게 연고전 응원가를 소개한답시고 만든 이 영상엔 눈과 귀를 의심케 하는 문제적인 가사의 행진이 이어졌다(14일 현재, 논란을 의식해서인지 해당 영상과 SNS 게시글은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고대 못생겼어"를 후렴 삼아 만든 이 노래의, '여혐 킬링 포인트'는 "이대한테 차이고 숙대한테 차이고..."이다.
이 노랫말은 이대·숙대를 '대한민국의 어느 명문 남대생의 여자친구' 정도로 전락시켰다. 여자대학 학생들은 또다시 누군가의 잠재적 여자친구가 되어, 사회에서의 여성으로서 역할을 강요받았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이대·숙대생들은 연고대생들이랑 사귀려고 이 대학에 다니는 게 아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구애를 기다리지 않는다왜 여자대학은 항상 누군가의 '짝짓기'의 대상이 되는 걸까? 이대생이라서 많이 듣는 말이 있다.
"연대생이랑 미팅해봤어?" "연대랑 소개팅 많이 들어오겠네." "이대생들이 옆 학교 남자를 잘 잡아서 시집 잘 가잖아." 이렇게 남성들의 짝짓기 대상으로 전락하는 이대생들은, 남성 중심적·이성애 중심적 사회상의 폭력에 직면한다.
비단 이화여대 학생들만이 직면한 문제는 아니다. 일례로 "고려대-성신여대", "육군사관학교-서울여대" 이런 식으로, 여자대학들은 지리상 위치가 가까운 공학과 짝지어진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위치는 가깝지만 '덜 명문대'인 곳이랑은 짝을 안 맺어 준다는 것이다. 신촌에선 연세대랑, 성북에선 고려대랑, 노원에선 육군사관학교랑. 여대와 그 여대보다 더 높은 학벌을 자랑하는 대학을 강제로 매칭시키는 놀이를 통해 남성들은 성별기득권과 학벌기득권을 동시에 차지한다.
(학벌주의를 기반으로) 라이벌 구도를 이루는 연대와 고대가, 서로를 놀리면서 노는 문화에선 '그들만의 여유'가 느껴진다. 학벌 기득권을 획득한 이들이 서로를 '고양이'와 '참새'로 부르며 형성하는 분위기는, 긴장감이 아닌 여유다.
이 여유로움을 기반으로 서로를 놀리는 문화에 즐거움을 느낀다는 건 잘 알겠다. 그런데, 이 놀이의 주체는 언제나 남학생이다. 연대 '공식' 응원가에서 '이대·숙대생에게 차여서 불쌍한 고대생'이라는 노랫말이 나오는 이유도 그러하다. 그 대학의 여성 주체들은 어디로 갔는가?
연대가 고대를 놀리는 데 사용한 방식은, 결국 '이성애자 남성'에게만 국한되는 표현이다. 여성을 향한 구애에 실패하는 모습을, 즉 남성성이 박탈되는 모습을 학벌주의와 결부해 희화화한다. '학벌은 좋지만 이성애적 연애에 실패하는 남성 고대생들'의 실체 없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건, 그저 수준 낮은 놀이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이는, 이대·숙대생 모두를 이성애자 여성으로 국한하는 것이고, 그 학생들을 명문대 남학생들의 구애를 기다리는 존재로 상정한다. '학문 공동체에서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은 완전히 없어지고, '누군가의 여자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으로 강요된 여성성만이 이화여대와 숙명여대를 설명하는 정체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자대학 학생들은 강제로 박탈되고 부여된 정체성에 큰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연·고대생들이 연고전이라는 대학 문화에서 즐거움을 느낀다면, 그들의 즐거움까지 앗아갈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그 즐거움을 이루는 핵심 요소인 '응원가'에 이런 식의 성차별적/학벌주의적 표현이 들어간다면, 그것은 본인들이 느끼는 즐거움을 넘어선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폭력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저 노랫말을 그새 흥얼거릴 연대생들을 생각하니, 절망감이 앞선다. '여혐'과 '학벌주의'의 '대환장 콜라보'는, 그래서 이렇게 무섭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14
'좋은 사람'이 '좋은 기자'가 된다고 믿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에디터입니다.
공유하기
고대는 못생겨 이대에 차이고?... 안 사귀어요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