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박철 형제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박철 목사
박철
"달리기를 못했다. 만날 꼴찌였다. 어쩌다 앞에 달리던 아이들이 와장창 넘어져 3등 한 적이 딱 한 번 있다. 내가 머리통도 크고, 귀가 크다. 언젠가 아버지가 '너는 달리기할 때 왜 머리를 좌우로 흔드니?' 하더라. 언제나 행동이 굼뜨고 빠릿빠릿하지 못해 아버지는 나를 미련곰탱이라고 불렀다. 어려선 아버지가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 싫었는데 지금은 좋다. 좀 미련하고 어수룩하게 사는 게 현명하게 사는 거 아닌가."'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경찰 공무원이었지만 박봉에다가 가장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집 근처에는 군 의무중대가 있었다. 어머니는 시집올 때 가져 온 재봉틀로 군인들 군복에 단추도 달아 주고 바짓단도 줄여 주고 수선해 주는 일을 해서 생계를 이끌어 갔다.
동네에 조그만 초등학교가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식들이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며 화천 읍내에 있는 '국민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읍내 초등학교는 왕복 30리가 넘었다. 박철은 수업을 마치면 누나를 기다렸다. 하지만 누나는 박철을 싫어해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했다.
"코를 많이 흘려 창피했겠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읍내를 벗어나면 같이 간다. 동네 어귀에 도착하면 날이 어둑어둑해진다. 그러면 마음이 쓸쓸해진다. 눈보라도 몰아치고. 나는 귀가 커서 '아이고, 귀 시려' 하고. 누나는 '아이고, 발 시려 발 시려' 하고 울면서 간다. 동네엔 하나둘씩 호롱불이 켜지고, 멀리 우리 집에서도 호롱불이 보인다. 어머니가 호롱불 들고 마당에 나와 기다리고 있다. 그걸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때 어머니는 어떤 심정으로 호롱불을 들고 마당에 나와 서 계셨을까? 어린 시절 그 호롱불 이미지가 내 삶의 지향이 됐다."
중학교 1학년 때 별명이 '울퉁불퉁'이라는 교사가 있었다. 어떨 때는 아이들을 슬리퍼로 때리기도 하고 시험 보고 나서 성적대로 때리기도 하고, 친구를 마주보게 한 뒤 서로 때리게 하는 폭력적인 교사였다. 어느 날 이 교사가 단편소설을 한 편 써 오라는 숙제를 냈다. 너무 암담했지만 숙제를 안 해 가면 맞을 게 뻔했다. 박철은 어린 시절 이야기를 썼다. 여름이면 개울에 가서 미역 감고 팽이 치고 놀던 이야기였다.
국어시간에 교사가 들어와 숙제를 걷어갔다. 그다음 시간이었다. 그 교사가 "박철!" 하고 불렀다. 박철은 깜짝 놀랐다. 그 교사는 "이거 네가 쓴 거야? 정말이야?" 하고 다그쳤다. 박철이 소심하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자기가 썼다고 하니 국어교사는 "그럼 한번 읽어 봐" 하고 말했다. 박철은 교탁 앞으로 나와 애들을 바라보고 읽었다. 비록 더듬더듬 읽었지만 자신이 쓴 거라 거침이 없었다. 국어교사는 박철 어깨를 두드려 주며 "네가 썼구나" 한마디 했다. 박철은 그 말이 굉장한 칭찬이었고 인정받았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글짓기대회는 도맡아 나갔다. 내가 글을 쓰게 된 계기였다. 성격이 예민한 사춘기 때 선생한테 받는 따뜻한 말, 한마디 격려가 무척 중요하다. '네가 썼구나' 하고 인정받은 게 나한테는 큰 격려가 됐다."생활도 나아지기 시작했다. 밖으로만 돌던 아버지가 박철이 중3 때 생활 전선으로 복귀했다. 본래 기독교인이었던 아버지는 신앙으로도 귀의했다. 아버지는 본래 사업 수완이 뛰어난 분이었다. 잡화상을 운영했는데 장사가 잘 돼 몇 년 사이에 가세가 펴기 시작했다.
대학을 두 번 들어간 박철박철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강원대 국어교육학과에 입학했다. 1974년, 난생 처음 집을 떠났다.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됐고 진보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알았던 세상하고 너무 달라 혼란스러웠다. 군사정권 유신정권에 대한 적개심, 분노가 일었다. 현실과 이상의 충돌이라고 할까, 내 안의 모순도 자연스럽게 해소가 안 되니까 매일 술 먹고 아무 데서나 뻗어 잤다.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서 데모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결국 1976년에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다."박철이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는 맏아들인 박철을 신학교에 보내서 목사를 만들겠다는 서원기도를 바쳤다. 박철은 그런 아버지의 기대를 이루지 못했다는 부채감이 있었다. 1979년에 박철은 다시 신학대학에 들어갔다.
"아버지가 굉장히 좋아하셨다. 당신의 기도가 드디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셨다. 하지만 나는 막상 신학교를 다니면서 목회에는 전혀 뜻이 없었다. 스스로 목사는 자질이 안 될 것 같았다. 대신 좋은 장로가 돼서 활동하겠다는 마음은 있었다."박정희가 무너졌지만 총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이 독재를 휘두르고 있었다. 박철은 신학대에서도 여전히 운동권이었다. 그때 가장 영향을 받은 사람이 함석헌이었다. 1958년〈사상계〉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써서 당시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사상가이자, 사회운동의 지도자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인물이다.
"함석헌 선생 강연을 참 많이 쫓아다녔다.《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감명 깊게 읽었다. 그분의 세상을 보는 안목에 매료됐다. 함석헌 선생은 '성경의 자리에서만 역사를 쓸 수 있다'고 했다. 성경을 해석하고, 성경으로 세상을 보게 됐다."박철이 대학을 졸업할 무렵, 1985년 3월 29일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 결성됐다. 1984년 6월에 출범한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과 10월에 출범한 민주통일국민회의(국민회의)가 통합해 발족한 것이다. 설립 당시 고문으로 함석헌, 김재준, 지학순 주교 등이 위촉됐고 상임의장에는 문익환 목사가 선출됐다. 박철은 민통련에서 사회운동가를 양성하는 민족학교 1기로 들어가서 1년 가까이 학습했다.
동지이자 연인, 김주숙과 만남그 무렵 박철은 우연히 한 여학생을 만난다. 어느 날 광화문에서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웬 여자가 "선배님!" 하고 인사를 건넸다. 동기라고 했지만 박철은 처음 보는 여학생이었다. 당시 박철은 학생회장 선거에 나섰다가 낙선했지만 학우들에게 주목받고 있었다.
박철은 그 여학생에게 술 한잔하겠냐고 물었다. 그래서 포장마차로 들어가 대화를 나누게 됐다. 여학생 이름은 김주숙이었다. 그이는 수업 시간에 박철이 발제를 하는 걸 보고 괜찮은 선배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나중에 실토했다.
"민중신학의 흐름이 형성될 시기였다. 민중신학 책 첫 장에 함석헌 선생의 씨알사상이 나오는데 내가 발제를 하게 됐다. 수업 시간에 노트도 없이 30분 가까이 발제를 했다. 함석헌 선생 강연을 쫓아다니면서 워낙 많이 들었으니 막힘이 없었다. 그때 그걸 보고 그 친구가 나를 보고 괜찮은 선배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술이 한두 잔 들어가고 친밀한 대화를 나누게 될 무렵 김주숙은 자기 동생이 '김의기'라고 고백했다. 박철은 순간 깜짝 놀랐다. '김의기'. 당시 서강대 무역과 4학년이던 1980년 5월 30일 서울 기독교회관 6층에서 광주학살의 진상을 촉구하며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뿌리고 투신한 열사였다.
김주숙 집안은 경북 영주의 한학자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경찰 공무원이었는데 스스로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왔다. 퇴직금을 친척에게 빌려줬다가 사기를 당했다. 공무원을 하던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어머니가 함바집에서 일꾼들 밥해 주고 버는 돈으로 살았다. 지문이 다 지워질 정도로 설거지를 했다. 언젠가 주민등록 갱신을 하러 갔을 때 열 손가락 지문이 하나도 없어서 손바닥으로 찍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집안을 일으키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막내아들 의기는 만날 수배당하고 쫓겨 다니는 신세였다. 김의기는 살아 있을 때, 이 시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농민들이기 때문에 농촌교회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김의기의 누나 김주숙 역시 공부를 잘했다. 하지만 집안 사정 때문에 서울여상을 나와 전두환 정권에 의해 언론이 통폐합되기 전 TBC방송국 경리 일을 했다. 그런데 1980년 5월 30일 끔찍이 아끼던 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혼절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김주숙은 동생의 죽음에 의문이 생겼다. 도대체 동생이 왜 죽었는가. 동생에게 애인도 있었다. 죽을 이유가 없었다. 김주숙은 동생이 교회를 다니면서 변했다고 생각했다. 김동완, 김홍기 목사가 하던 형제교회였다. 박정희 정권 때 김동완 목사는 교인 전체와 머리띠를 두르고 신당동 일대에서 "유신독재 타도"를 외치다 전원이 잡혀 들어갔던 적이 있었다.
김주숙은 동생의 죽음이 무엇 때문인지, 예수가 누군지 알고 싶었다. 동생이 다니던 형제교회를 나갔다. 하지만 열심히 교회를 다녀도 만족할 수 없었다. 김주숙은 담임목사였던 김홍기 목사에게 신앙 상담을 받았다. 김홍기 목사는 김주숙에게 신학교를 가 보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다닌 곳이 박철이 다니던 신학대학이었다. 김주숙은 독재 정권의 실체를 알면서 동생의 죽음에 대해 의문이 조금 풀렸다. 동생이 추구했던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여성운동가, 활동가가 될 생각을 했다.
박철은 참 세상 좁구나 생각했다. 둘은 그날로 의기투합이 돼 매일 만나 붙어다녔다. 어느 날 김주숙이 예쁜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나타났다. 마음이 통해 그날 둘만의 약혼식을 치렀다. 그리고 졸업을 앞두고 교수들과 학생들이 모여 있는 사은회에서 박철은 사회자한테 결혼 발표를 한다고 알려 달라는 쪽지를 건넸다.
"사회자가 발표를 했더니 반응이 싸늘했다. 축하도 없고, 박수도 없었다. 나는 거침없이 행동하고 방만하고 그런 사람으로 주목을 받던 사람이었다. 둘이 늘 붙어 다니는 건 알았지만 둘이 결혼한다는 건 상상도 못 했을 거다. 김주숙이 불쌍하다? 뭐 그런 분위기? 하하! 나도 유쾌하지는 않았다."박철은 졸업하는 데 6년이 걸렸다. 졸업하면서 박철은 결심했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목회자가 되자.' 삶의 초점은 E. F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였다. 그리고 법정 스님의 《무소유》와 《장자》였다. 박철은 그 세 권의 책을 책 표지가 닳도록 읽었다. 그 책 세 권은 박철의 삶의 방향을 분명하게 설정해 줬다.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놓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