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의원들의 '환생경제' 공연한나라당 의원들로 구성된 극단 '여의도' 창단 기념공연 '환생경제'가 2004년 8월 28일 전남 곡성 봉조리 농촌체험마을에서 열렸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단장 박찬숙 전 의원, '저승사자'역을 맡은 주성영 의원, '경제' 친구역을 맡은 나경원 의원, '번영회장'역을 맡은 송영선 의원(현 친박연대), '노가리'역을 맡은 주호영 의원, '민생'역을 맡은 심재철 의원, '박근애'역을 맡은 이혜훈 의원, '부녀회장'역을 맡은 박순자 의원(현 최고위원), '수집상'역을 맡은 이재웅 의원, '번데기'역을 맡은 정두언 의원, '5천년 역사바로세우기 위원장'역을 맡은 정병국 의원.
이종호
2004년 8월 28일 전라남도 곡성군 봉조리,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의원 연찬회가 열린 그 날 밤의 공기는 묘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야당의 아성인 호남에서 연찬회를 여는 것도, 광주 5·18 국립묘지를 단체 참배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뉴스가 많다 보니 취재기자 두 명이 돌아가며 취재하고 기사를 써야 했다.
내가 기사를 쓰는 동안 박형숙 기자가 그날 저녁 마을에서 열린 의원들의 '작은 문화제'를 취재하고 돌아왔는데, 그의 감상평은 이랬다.
"선배! 의원들이 무슨 연극을 하길래 우리도 같이 보긴 봤는데, 연극 내용이 좀 이상해."그날 밤 기사를 쓰기 시작한 박 기자는 이튿날 오전 5시가 넘어서야 기사를 넘겼다. 노무현 대통령을 비하(또는 풍자)하는 내용의 연극 '환생경제' 사태는 이렇게 시작됐다(관련 기사:
한나라 의원연극, 노 대통령 욕설 파문).
국회의원들이 노무현 정부를 풍자하는 연극을 준비한다는 얘기는 그 전부터 들려왔지만, 극에서 "사나이로 태어났으면 불알 값을 해야지", "그 놈은 거시기 달 자격도 없는 놈...", "육시랄놈", "개잡놈" 같은 욕설이 난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캐스팅도 호화판이었다. 노가리 역의 주호영(바른정당 원내대표), 박근애 역의 이혜훈(바른정당 최고위원), 노가리 큰아들 역의 심재철(국회 부의장), 깍두기 역의 정병국(바른정당 대표), 나경원·박순자 의원과 정두언·송영선 전 의원 등등 지금도 정치판에서 한 가락 하는 의원들이 일생일대의 연기를 선보였다(공교롭게도 당시 출연자들 대부분이 새누리당을 이미 떠났거나 떠나려고 보따리를 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마이뉴스> 방송팀(오마이TV의 전신) 김윤상 기자가 촬영한
55분 분량의 동영상은 지금도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손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 대변인들의 반응은 이랬다.
"우리의 연극은 제목이 '환생경제(還生經濟)'로 지금 무너져 내리는 경제와 민생을 살리자는 줄거리의 풍자극이었다. 이를 두고 내용은 도외시한 채 아주 부분적인 대사 몇 개를 빌미로 연극 전체를 문제 삼는 것은 올바른 문화적 자세가 아니다...(중략)... 어쨌든 이 문제로 정치권이 국민들을 또 피곤하게 만들고 있는 이 상황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 생각한다."(임태희)
"공연의 주제는 경제회생을 위해 노 대통령이 더욱 열심히 해달라는 것이다. 열린우리당도 과반여당 답게 크고 넓게 보 고 경제를 살리는 데 노력하길 바란다."(전여옥)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나에게 "<오마이뉴스>는 왜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쳐다보게 만드냐"는 원망 섞인 항변을 하기도 했다. 한나라당은 이렇게 "연극은 연극으로 이해해주길 바란다"고 맞섰지만, '표현의 자유'를 빙자한 대통령 조롱이라는 반발도 거셌다.
당시 여당(열린우리당)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대변인단이 총출동해 의원들의 연극을 맹비난했다.
당시 대변인이었던 김현미 의원은 "저속한 욕설과 성비하적 모욕으로 일국의 대통령을 욕해대는 것이 한나라당의 진면목이냐? 망월동 5.18묘역까지 참배한다면서 호남을 순례하는 이유가 고작 이것이었냐"며 박근혜 대표의 사과를 요구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당시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이 "정치적으로 따끔하게 한 번 지적하면 된 거지, 이런 걸 법정(명예훼손 소송)이나 국회 윤리위원회까지 끌고 갈 필요가 있겠냐?"고 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한때의 해프닝인 줄 알았던 '환생경제'의 질긴 생명력 의원들의 연극을 맨 앞줄에서 박수를 치며 관람했던 박근혜 대표는 이듬해 2월 27일 서울 대학로 무대에 올려진 동명의 연극을 재차 관람했다. '이 정도의 정치적 표현도 받아들이지 못하냐'는 시위 성격이 짙은 행보였다.
그는 자신이 대통령이 된 뒤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넘어서면 안 되는 도가, 선이 있다"고 누드화 '더러운 잠'에 분개했다. 경계가 명확하지 않지만, 권력자에 대한 비판은 받아들이되 인간적인 조롱은 감내할 수 없다는 대통령의 항변을 나는 수긍하는 편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야당 대표 시절 행보를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역지사지로 아셨으면 한다.
어쨌든 그렇게 한때의 해프닝으로 끝나는 줄 알았던 '환생경제'의 생명력이 12~13년 갈 줄은 당시에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환생경제'는 국회의원들, 특히 현재의 야당 의원들이 막말 논란에 휘말릴 때마다 소환됐다.
2012년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민주당 김용민 후보(서울 노원갑)의 막말 방송을 문제 삼았을 때, 민주당 박용진 대변인은 "새누리당은 8년 전 '환생경제' 연극 막말에 대해 한마디라도 사과했느냐"고 비판했다. 같은 해 이종걸 의원이 박근혜 후보를 '그년'이라고 지칭해 논란이 일어났을 때도 야당 지지층은 '환생경제'를 불러냈다.
2013년 7월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변인의 '귀태(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 발언이 논란이 됐을 때도 새누리당 홍문종 사무총장은 둘을 비교하는 질문에 "귀태는 있어서는 안 될 발언이다. 환생경제를 뛰어넘는 발언"이라고 평가했다(7월 15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