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누아 아몽과 버니 샌더스의 만남2016년 9월, 프랑스의 좌파 정치인 브누아 아몽과 미국의 좌파 정치인 버니 샌더스가 만나서 찍은 사진이다. 두 사람 모두 기성 정치권의 아웃사이더에서 시작하여 극적인 성장과 '진보 정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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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누아 아몽이 한국의 일부 언론들의 코멘트처럼 단순히 '더 급진적이고, 더 좌파적이며, 더 새로운' 인물에 그쳤다면 이번 경선에서 40여만의 표를 모으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미 그런 후보라면 공산당과 단일화를 이룬 '좌파전선'의 장 뤽 멜랑숑도 있고 '반자본주의'를 당명에까지 분명하게 써놓은 반자본주의신당(NPA)의 후보 등 사회당보다 좌파에 포진해있는 후보라면 충분히 찾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장 뤽 멜랑숑을 제외한 다른 후보들은 가시적인 지지율도 보이지 못하는 게 현실이며, 장 뤽 멜랑숑 후보 역시 그 동안 선거에 꾸준히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책적인 대안의 부족이나 지지율 10% 초중반에 계속 머무르는 데에만 그쳤다는 비판을 받는다.
단순히 프랑스 시민들은 '좌파적'이라는 정체성만으로 투표를 결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프랑스 좌파들을 '구태'라고 비판하며 사회당을 박차고 나온 전진(En Marche)의 '엠마뉘엘 마크롱' 후보가 프랑스 대선 주자 중 명실상부 TOP 3에 들었다는 점에서 시민들은 지금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키'와 분명한 '자기 정치', 무엇보다 '자신들에게 가까운 정치'를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시민들의 좌우를 막론한 '기성정치에 대한 염증' 역시 큰 요인 중 하나였다.
수많은 요인들 중 시민들이 가진 '기성 정치에 대한 피로'는 현재 프랑스 정치의 가장 큰 화두 중 하나다. 프랑스 고등교육기관 중 엘리트 학교로 손 꼽히는 '그랑제꼴(Grandes Ecoles)' 출신들, 특히 '국립행정학교(ENA)' 출신들이 프랑스 정계를 비롯한 사회의 상층을 독점하면서 프랑스의 사회 불평등이 심화되었는데, 더욱이 위와 같은 학교들은 비싼 등록금으로 상류층이 아닌 학생들이 지원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여 더 큰 문제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위와 같은 학교들에 다니는 학생들이 다른 프랑스 청년들처럼 아르바이트를 해야하거나, 월세 걱정을 하거나 하지 않아도 되는 현실 등이 더욱 프랑스의 엘리트 정치인들을 민생과 괴리되게 만들었다. 그런 코스를 거친 정치인들, 특히 지난 올랑드 내각에서 정부 요인을 맡았던 정치인들과 노동개악 등의 정책을 밀어붙인 사회당 정치인들 대다수가 위와 같은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는 점에서 프랑스 시민들은 사회당에게서 존재 가치의 특별한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사회당과 프랑스가 프랑스의 노동자들이나 서민들이 아닌 테크노크라트들에 의해 움직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의 유지가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통찰력있는 조언이었던 것이다.
반면 브누아 아몽은 위와 같은 사회당의 주류 정치인들과는 다른 코스를 밟았다. 다른 후보들과 다르게 그는 프랑스의 부르타뉴에 있는 국립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국회의원 보좌관 활동을 통해 정계에 입문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사회당의 청년 조직(현재는 별도로 운영되지만 원래는 사회당과 하나였다)인 Mouvement des Jeunes Socialistes(MJS)의 대표로 선출되며 천천히 정치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고 프랑스의 노동 정책 기틀을 닦은 정치인 마틴 오브리의 발탁으로 점점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올랑드 내각의 교육정책과 상업, 사회적 경제 정책을 담당하는 장관으로 발탁되었지만, 이번 선거에도 나왔던 아르노 몽뜨부르와 함께 그에 반기를 들며 장관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대선 후보 경선에서 1등을 얻은 지금까지 학벌의 도움없이 당에서 차근차근 성장한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영국 노동당의 대표인 제레미 코빈을 자주 인용하며 자기 정치를 설명하곤 하는데, 제레미 코빈 역시 그와 비슷하게 당에서 차근차근 성장하며 몸소 현실정치를 부딪히며 배운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기성 정치인들이 민심과 괴리되는 모습을 극복하기 위해 인터넷을 통한 직접적인 소통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브누아 아몽이 프랑스 시민들의 지지를 받은 것은 단순히 그의 이력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가진 '새로운 아이디어'도 그 이유였다. '새로운 좌파'를 약속했지만 정작 '자기 정치의 부재'와 '민심과의 불통'으로 정치적인 원동력을 만들지 못했던 이들도, 언제나 그렇듯 선명한 가치와 분명한 좌파적 대안, 근본적인 변화와 혁명을 외치며 '개량주의 비판'을 이야기했던 이들도 프랑스 시민들에게 폭발적인 관심을 얻기엔 역부족이었다.
실질적으로 그들이 어떤 정치를 하고자 하는지, 그게 시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삶을 어떻게 개혁하는 지와는 동떨어져 있었고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비전의 부족함으로 항상 우파 정치인의 비판 요소가 되거나 현실의 성과를 만들기엔 힘에 부치는 것이 컸기 때문이다. 또한 설문조사에서 청소년들에게 가장 인기없는 직업이 '정치인'으로 꼽혔을만큼 정치인의 말만 앞선 모습들에 대한 불신을 넘어서려면 검증된 정책과 정확한 비전이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브누아 아몽이 가진 비전이 프랑스 시민들에게 통할 수 있었다.
그가 다른 후보들과 차별화할 수 있었던 것은 미래 시대에 대해 준비가 된 그의 정책 기조였다. 브누아 아몽은 앞으로 다가오게 될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한 정책 프로그램들을 준비했다. 원래 프랑스가 항상 강세를 보였던 프랑스의 2차 산업이 위축되고, 환경에 대한 대비와 자원과 상품을 효율적으로 생산하거나 소비하기 위한 기술들의 발전이 급속도로 이뤄지면서 이에 대한 산업 시스템 변화에 대한 대응과 이에 맞는 정부 정책의 변화 요구가 거세져왔다.
그래서 브누아 아몽은 로봇세 도입과 이를 통한 전국민에 80만원 상당의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정책, 그리고 청년 실업과 인재난 문제를 대비하기 위한 청년수당 정책 등을 약속하며 그의 경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또한 프랑스 전기 생산의 과반을 차지하는 핵발전소의 폐기를 약속함과 동시에 화석연료(디젤)를 통해 발전되는 전기 퇴출을 약속하고 그와 더불어 지역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지속가능한 에너지 생산 프로젝트를 도입하는 것을 대안으로 내세웠다. 또한 현재 파리 대중교통에 상용화 된 전기 자동차를 보다 대중에게 상용화하는 정책 등 기술 발전을 통한 경제 활성화 대책을 약속했다. 이 밖에도 국민투표 활성화나 민주주의 개혁을 위한 근본적인 정책들을 제시하며 그의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브누아 아몽의 프로그램은 세 번의 토론을 통해 검증의 심판 위에 오를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제안은 프랑스 시민들에게 설득력이 생겼고 결국 마지막 토론은 그의 승리로 끝났다(방송국 설문조사에서 토론에서 가장 합리적이었던 후보로 브누아 아몽이 꼽혔음). 그리고 그 다음 주말에 있었던 선거에서 승리했다.
설문조사에선 마뉘엘 발스나 아르노 몽뜨부르와 같은 노련한 정치인들에게 한없이 밀렸던 그가 예상 밖의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당선에는 사회당에 실망했었던 기존 사회당 지지자들과 '분노한 청년들'의 역할이 가장 컸다. 실제로 청년들의 인구가 더 많은 지역구의 개표 결과가 전체 평균보다 브누아 아몽의 지지율이 10%가량이 더 높을 정도로 청년들과의 소통과 그의 정책이 성공했음을 증명해냈다. 무엇보다 당권파의 패권에 대한 비판 역시 컸던 것이 한 역할을 했다.
4일 앞으로 다가온 결선 투표, 그 이후에 사회당은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