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의 태극기. 서울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이렇게 1883년부터 태극기가 공식적으로 사용됐지만, 당시에는 지금만큼의 대중적 사랑을 받지 못했다. 국가가 국민의 소유물이 아니라 왕실의 소유물이던 왕조 시대의 대중은 나랏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또 지금처럼 교통·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까닭에, 일반 대중은 자기가 사는 군(郡) 단위 바깥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래서 왕조의 상징물인 태극기가 대중적 사랑을 받기는 힘들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정조 임금이 떠난 뒤로 조세 수탈이 심해지고 먹고 사는 게 훨씬 더 팍팍해진 탓에, 19세기에는 민중 총궐기(민란)가 전국적 차원에서 상당히 자주 발생했다. 그 본격적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은 1812년 홍경래의 난이고, 정점을 보여주는 결정타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었다.
교과서나 각종 서적에는 홍경래의 난이 1811년에 발생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순조 11년 12월 20일자 <순조실록>에 따르면 홍경래의 거사 일자는 음력으로는 순조 11년 신미년 12월 18일이고 양력으로는 1812년 1월 31일이었다.
조선 왕조는 홍경래의 난이나 동학전쟁 같은 충격적 경험들로부터 교훈을 제대로 얻지 못했다. 정권을 혁신하고 정치를 혁신하기보다는 민중 궐기를 진압하는 데만 급급했던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5천만 중에서 1백만 명만 뛰어나왔으니 나머지 4천 9백만은 정부 지지자들일 것"이라는 식의 안이한 발상을 가졌던 것이다. 5천만의 대다수가 정부를 반대하기에 그중 1백만이 희생적으로 뛰어나왔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진압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특히 동학전쟁 때, 조선 정부는 농민군을 진압할 목적으로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다가, 불청객으로 침입한 일본군이 청일전쟁을 일으켜 청나라 군대를 내쫓자 이번에는 일본군과 합세해서 농민군 진압에 나섰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일반 대중은 조선 왕조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등을 돌리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 활동이 대성공을 거둔 데 반해, 1905년 이후의 구한말 의병 활동이 큰 성과를 내지 못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일반 대중이 왕조로부터 등을 돌린 뒤였기에, 임진왜란 때만큼의 호응도가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조선 왕조가 만든 태극기 역시 대중적 사랑을 받기가 힘들었다.
그랬던 태극기가 대중적 사랑의 대상이 된 결정적 계기가 있다. 바로 3·1운동이다. 1919년 이 운동 때, 우리 국민들은 일본에 맞설 상징물로 태극기를 선택했다. 일본이 총칼로 억압하는 상황에서 민족의 상징물을 새로 창조하기는 힘들었다. 조선 왕조에 대한 기억은 안 좋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태극기를 민족의 상징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재등장한 태극기는 '대한독립 만세!'나 "조선독립 만세!" 혹은 '일본 나가라!'라는 구호와 함께 3·1 운동의 핵심적 상징물로 부각됐다. 우리 측 추산 200만 명, 일본경찰 측 추산 100만 명이 오로지 태극기만 들고 기마경찰의 총칼에 맞서 싸웠다. 일부 지역에서는 무기를 들었지만, 대부분 지역에서는 태극기만 들었다. 그래서 무방비로 총칼에 찔리면서도 한국인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쳐댔다. 이랬으니 태극기가 사랑과 애착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