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딸 옹호에 동원... 심각한 위험 빠진 태극기

3.1운동 거치며 국민들 사랑받은 태극기... 박근혜 옹호 집회에 쓰이다니

등록 2017.01.23 09:34수정 2017.01.23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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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가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은 지 아직 100년이 채 안 됐다. 정확히 계산하면 98년이다. 그런데 자칫하면 그 태극기가 우리 곁을 떠날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 박근혜보다 더 큰 위기에 처한 것은 다름 아닌 태극기라고 할 수 있다.   

태극기가 처음 사용된 것은 1882년이다. 그 해, 박영효가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수신사(修信使)는 신의를 닦는 사신이란 의미였다. 대마도(쓰시마)에서 도쿄까지 가는 길의 중간쯤인 고베에 도착해서 숙소에 들어간 박영효가 했던 일이 바로 국기 게양이다. 이것이 태극기가 공중에 펄럭이는 최초의 순간이었다. 이때의 상황을 <사화기략>이란 기행문에서 박영효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 만든 국기를 체류 중인 숙소에 걸었다. ······ 중심에는 태극을 그리고, 청색과 홍색을 채워 넣었다. 네 귀퉁이에는 건곤감리 4괘를 그렸다. 이전에 주상의 명령이 있었던 일이다."

태극·청색·홍색·건곤감리에서 알 수 있듯이, 최초로 게양된 조선 국기는 지금의 태극기와 비슷했다. 이전에 주상 전하의 명령이 있었다고 했다. 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하는 것에 관해 고종 임금의 사전 지시가 있었던 것이다.

박영효가 고베에서 태극기를 최초로 게양한 날짜는 <사화기략>에 따르면 임오년 8월 14일이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1882년 9월 25일이다. 조선 정부가 태극기 사용에 관한 왕명을 공식 반포한 날은, <고종실록>에 따르면 계미년 1월 27일이다. 양력으로는 1883년 3월 6일이다.

 구한말의 태극기. 서울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구한말의 태극기. 서울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김종성

이렇게 1883년부터 태극기가 공식적으로 사용됐지만, 당시에는 지금만큼의 대중적 사랑을 받지 못했다. 국가가 국민의 소유물이 아니라 왕실의 소유물이던 왕조 시대의 대중은 나랏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또 지금처럼 교통·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까닭에, 일반 대중은 자기가 사는 군(郡) 단위 바깥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래서 왕조의 상징물인 태극기가 대중적 사랑을 받기는 힘들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정조 임금이 떠난 뒤로 조세 수탈이 심해지고 먹고 사는 게 훨씬 더 팍팍해진 탓에, 19세기에는 민중 총궐기(민란)가 전국적 차원에서 상당히 자주 발생했다. 그 본격적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은 1812년 홍경래의 난이고, 정점을 보여주는 결정타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었다.


교과서나 각종 서적에는 홍경래의 난이 1811년에 발생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순조 11년 12월 20일자 <순조실록>에 따르면 홍경래의 거사 일자는 음력으로는 순조 11년 신미년 12월 18일이고 양력으로는 1812년 1월 31일이었다.

조선 왕조는 홍경래의 난이나 동학전쟁 같은 충격적 경험들로부터 교훈을 제대로 얻지 못했다. 정권을 혁신하고 정치를 혁신하기보다는 민중 궐기를 진압하는 데만 급급했던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5천만 중에서 1백만 명만 뛰어나왔으니 나머지 4천 9백만은 정부 지지자들일 것"이라는 식의 안이한 발상을 가졌던 것이다. 5천만의 대다수가 정부를 반대하기에 그중 1백만이 희생적으로 뛰어나왔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진압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특히 동학전쟁 때, 조선 정부는 농민군을 진압할 목적으로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다가, 불청객으로 침입한 일본군이 청일전쟁을 일으켜 청나라 군대를 내쫓자 이번에는 일본군과 합세해서 농민군 진압에 나섰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일반 대중은 조선 왕조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등을 돌리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 활동이 대성공을 거둔 데 반해, 1905년 이후의 구한말 의병 활동이 큰 성과를 내지 못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일반 대중이 왕조로부터 등을 돌린 뒤였기에, 임진왜란 때만큼의 호응도가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조선 왕조가 만든 태극기 역시 대중적 사랑을 받기가 힘들었다.

그랬던 태극기가 대중적 사랑의 대상이 된 결정적 계기가 있다. 바로 3·1운동이다. 1919년 이 운동 때, 우리 국민들은 일본에 맞설 상징물로 태극기를 선택했다. 일본이 총칼로 억압하는 상황에서 민족의 상징물을 새로 창조하기는 힘들었다. 조선 왕조에 대한 기억은 안 좋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태극기를 민족의 상징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재등장한 태극기는 '대한독립 만세!'나 "조선독립 만세!" 혹은 '일본 나가라!'라는 구호와 함께 3·1 운동의 핵심적 상징물로 부각됐다. 우리 측 추산 200만 명, 일본경찰 측 추산 100만 명이 오로지 태극기만 들고 기마경찰의 총칼에 맞서 싸웠다. 일부 지역에서는 무기를 들었지만, 대부분 지역에서는 태극기만 들었다. 그래서 무방비로 총칼에 찔리면서도 한국인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쳐댔다. 이랬으니 태극기가 사랑과 애착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유관순.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유관순.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김종성
3월 1일 서울 만세시위에 참여한 열여덟 살 여중생 유관순도, 휴교령이 내려진 3월 10일부터는 고향인 충남 천안에서 비밀리에 태극기 제작에 참여했다. 그리고 4월 1일 아우내 장터 시위 때는 자신이 만든 태극기를 부모님과 친척들에게 나눠준 뒤, 이들과 함께 만세를 외치며 일본 경찰을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그렇게 태극기를 쥔 채로 유관순은 헌병의 총칼에 찔리고, 유관순의 아버지는 총알에 맞아 쓰러지고 뒤이어 어머니도 쓰러졌다.    

이렇게 1919년에 우리 민족은 태극기만 들고 일본 경찰에 항거하다가 그들의 총칼에 쓰러졌다. 무려 200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런 강렬한 기억을 형성하는 데 동참했다. 이랬으니 태극기가 우리 민족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3·1 운동 직후에 수립된 상하이 임시정부나 이 임시정부의 계승자인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태극기를 상징물로 채택한 것도 그런 강렬한 기억 때문이다.

1919년의 태극기 물결이 강렬한 인상을 형성했다는 점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뛰어나온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1919년에 태극기가 항일의 상징물로 명확히 각인됐기에, 26년 뒤인 8·15 광복 때도 태극기 물결이 재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태극기는 일본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 항일투쟁 와중에 흘린 시뻘건 핏물이 태극기 속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미국 국기 성조기는 영국에 맞선 독립운동과 50개 주의 연방 참여를 표현하고 있다. 성조기는 그런 식으로 미합중국의 형성 과정을 상징한다. 프랑스 국기 삼색기는 1789년 대혁명 당시 시민군이 착용한 모자 문양을 토대로 하고 있다. 삼색기는 이런 식으로 프랑스 민주국가의 성장 과정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태극기 속에도 1919년 이래의 항일투쟁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 민족의 정신적 구심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서울시청과 덕수궁 사이에서 열린 태극기 집회(맞불 집회).
서울시청과 덕수궁 사이에서 열린 태극기 집회(맞불 집회).김종성

그런데 태극기가 민족의 구심점이 된 1919년으로부터 100년이 약간 안 된 2016년 연말. 이때부터 태극기는 심각한 위험에 빠지고 있다. 박근혜·최순실에 대한 처벌을 반대하고 낡은 정치질서의 개혁을 원치 않는 사람들이 바로 이 태극기를 들고 집단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 대다수가 박근혜·최순실 처벌을 원하고 정치 질서의 혁신을 원하는 이 마당에, 낡은 극우 수구 세력이 하필이면 태극기를 들고 분탕질을 연출하다 보니, 그동안 형성된 태극기의 이미지가 잘못하면 찢어질 수도 있게 된 것이다. 탄핵반대 세력이 태극기를 촛불의 반대 개념, 개혁과 진보의 반대 개념으로 부각시키고 있으니, 태극기의 위상과 의미가 심대한 위협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좀더 지속적으로 이어지면 많은 국민들의 눈에는 '태극기' 하면 '박근혜·최순실'이 연상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태극기 속에 녹아들어 있는 3·1운동과 유관순의 이미지는 그만큼 약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항일투쟁의 상징물이었던 태극기를 친일파 박정희의 딸을 옹호할 목적으로 열심히 흔들어대고 있으니, 태극기의 역사적 의미가 그만큼 퇴색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태극기의 역사적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기가 쉬울 것이다.

그래서 저세상의 유관순도 2016년 연말부터 급변하는 태극기의 이미지를 보고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항일을 위해 흔들었던 저 태극기가 하필이면 친일파의 후예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니! 그는 정신적 혼란으로 동요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는 3월 1일에 당장에라도 환생해서 "박근혜 퇴진! 구질서 청산!"을 목청껏 외치고 싶을 것이다.

만약 환생하게 된다면, 유관순은 태극기를 준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분명히 촛불을 준비할 것이다. 1919년에는 가족 단위로 태극기를 들어야 했지만 2016년과 17년에는 가족 단위로 촛불을 들어야 한다는 점을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만약 김진태의 호언장담까지 들었다면, 일반 초가 아닌 LED 초를 꼭 챙겨야 한다는 점도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태극기 #태극기 집회 #맞불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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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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