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와 수도전매각 부지에 난 잡초들. 앞 파란 플라스틱은 수도관 덮개. 수도관 인입비용으로 100만원 가량이 지출됐다.
김창엽
27살 때던 1988년 가을, 서울에서 처음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대략 5년쯤이흐른 1993년 봄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굳힐 수 있었다.
이론적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도시 생활이 (섭리에서) 너무 많이 벗어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석유화학 산업의 부산물과 콘크리트로 가득 찬 서울을 떠나 보다 자연과 가까운 곳으로 가겠다는 결심을 굳혔지만, 현실은 만만하지 않았다.
겨우 제 발로 걸을 수 있었던 딸과 아들, 아이 엄마, 더불어 할머니와 어머니, 아버지, 동생 셋에 나까지를 포함해 정확히 10명 식구의 생계가 거의 오롯이 내 어깨에 달려 있었다. 1993년 귀연을 결심했지만, 2008년 실천까지 정확히 15년이 걸렸던 것이다.
나로서는 틈만 나면 최대한 빨리 시골 생활을 시작하고 싶었다. 즉 시골 생활을 개시할 수 있는 최소한도의 기초 여건만 갖춰지면 서울을 떠나려 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딸과 아들이 여차하면 노동 전선에 뛰어들 수 있을 나이가 되면, 웬만하면 시골로 떠나려했다. 2009년은 막내인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던 시점, 즉 사실상 성인으로 취급할 수 있는 나이였다.
정착 후보지를 물색하려 전국을 돌면서 최종적으로 마음이 끌리던 곳은 강원도, 그 가운데서도 해발 1000m 안팎의 홍천 고원지대 일대였다. 하지만 막판에 현재의 공주로 낙착됐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 홍천으로 갈 경우 결혼 이후 동거보다는 별거기간이 훨씬 길었던 아이 엄마와 또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게 걸림돌이었다. 아이 엄마는 그때나 지금이나 대전에서 일한다. 다른 하나는 연로한 어머니 아버지가 겨울이 길게는 연중 절반 가량인 강원도 산간 오지에서 제대로 적응할 수 있느냐는 문제였다.
'자연스런' 농사는 상상했을 때보다 실전에서 훨씬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