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들 에스텔라로 향하는 순례자들
정효정
- 우선 책 제목에 대한 반응이 뜨거울 것 같다. 어떤가?"영화 <나의 결혼 원정기>에도 다뤄졌듯이, 한국에서 남자가 여자를 찾는 건 아무렇지 않은데 여자 입에서 '나 남자 찾아'라고 욕망을 말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여자들은 '재밌다'는 반응이 많은데 남자들은 다르다. '그렇게 궁하냐'고 무시하거나 '서양 남자 만나러 가는 허파에 바람난 김치X'이라는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나보다 부모님께서 많이 속상해하셨는데, 한번은 아빠가 댓글을 다셨다고 하더라. '책을 읽어보면 그런 내용 아니란 걸 아실 겁니다'라고.
한편에선 '신성한 순례길에 왜 남자를 찾냐, 나를 찾아 걷는 길인데' 이런 반응도 있었다. 남자를 찾는 것 자체가 불온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런데 가만히 있는 자아를 찾아갈 순 없지 않나. 잘 있는 자아를... (웃음)"
- 표지도 인상적이었다. 손을 잡고 고개 돌린 네 남자들. 미리 구상한 건가?"여행 전에 콘셉트를 잡고 갔다. 사진 찍은 사람 중엔 친한 사람도 있고 안 그런 사람도 있다. 친한 사람들은 장난처럼 '고개 돌려봐' 하고 몇 번 다시 찍기도 했는데, 처음 만난 사람과는 아무래도 어색했다. '나랑 사진 좀 찍을래?' 그러면 상대가 '응' 하는데, 내가 '등 돌려서 저쪽 봐'라고 해버리니까. 일본 친구같은 경우 굉장히 당황해했다. (기자 : 표지에서 앞을 보고 있는 사람도 한 명 있던데) 내가 그렇게 뒤를 보라고 했는데도 끝까지 앞을 고집한 사람이다. 그래도 다들 재밌다는 반응이었다."
- 산티아고 길을 걷게 된 계기가 '산티아고에 괜찮은 사람 많아요'라는 꼬임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 꼬임은 사실이었나? "(한숨) 산티아고 길을 걷는 이들 연령대가 높다. 은퇴자 버킷리스트 1위라고 하더라. 30~40대 남자들이 많지 않다. 그보다 어리거나 나이 많은 분들이 많다. 또래가 있어도 이분들은 정말 인생에 고민이 있어 온 거다. 순수하게 순례만 하고 싶어서. 그래서 흑심은 나만 품은 걸로(웃음). 지인은 내가 산티아고 길 갔다왔다고 하니까 '거기 여자한테 흑심 품고 걷는 남자들 많다던데' 하더라. 그래서 '내가 바로 그 흑심 품은 사람이야'라고 말했다."
- '한국에선 1km만 넘어도 택시를 탄다'면서 무슨 힘으로 이 길을 걸었나?"그러게 말이다. 처음에 '남자 찾아 산티아고 갈 거야' 하니까 주변에서 '넌 며칠있다 포기할 거야' 하면서 다들 비웃었다. '얼마 못 걷고 내려오면 쪽팔리겠지' 싶은 맘이 있었다. 사실 800km를 다 걸을 생각은 없었다. 괜찮은 남자가 나타나면 손 잡고 바로 바로셀로나까지 가려고 했는데... 나도 다 걸을 줄은 몰랐다. 근데 (남자가) 안 나오더라. (웃음) 초반엔 오기로, 중간부터는 친구들이 생기면서 다니는 게 재밌어졌고, 걷는 것도 익숙해져 걸었다. 마지막엔 이만큼 왔는데 포기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걸었고. (웃음)"
- 짐을 지고 걷는 게 너무 힘들지 않았나?"처음엔 힘들어서 5~10유로 내면 다음 지점까지 짐을 옮겨주는 '동키 서비스'를 2번 이용해봤다. 근데 그 5유로가 매일 쌓이면 엄청나겠더라. '차라리 그 돈으로 고기 사먹자' 해서 나중엔 지고 다녔다. 내 배낭은 10키로 정도로 그래도 가벼운 편이었다. 한국 사람은 짐을 적게 해서 다니고 유럽 사람들은 배낭이 커도 다 짊어지고 다닌다."
- 여행지에서의 사랑, <김종욱 찾기>같은 운명을 기대한 건가?"이왕이면 <비포선라이즈>로. (웃음)"
- 다시 갈 수 있겠나?"갈 수 있다. 하지만 다시 남자 찾아 가는 건 힘들 것 같다. 해봐서 아니까. 좋아하는 사람들 데리고 같이 가고 싶다. 여기 가보니까 좋더라 하고... 댓글에도 '뭐 거기까지 가서 남자 찾냐. 차라리 국토 종단해라' 별의별 댓글이 다 있더라.
사실 난 걷는 여행을 별로 안 좋아했는데, 막상 가보니까 길에서 사람 만나고, 풍경 변하는 거 보고, 생각하는 게 좋더라. 이 생각 저 생각 하면서 30일 보내는 게 좋았다. 그냥 멍 때리는 시간을 30일 가질 핑계로 다시 가고 싶다. 어렸을 때 방학에 얼마나 멍하니 있나. 나는 멍하니 있었던 그 시간이 내 인생에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굳이 뭔가를 찾으려고 안 해도 되고 여유있는 시간,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안 가져도 되는 시간들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산티아고는 다른 여행이랑 다른 게 숙박지, 이동 거리 이런 걸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냥 '오늘 몇 키로 걷지' 하다가 자기가 못 걷겠으면 못 걸어도 되고 중간 숙소에서 쉬면 되니까. 딱히 고민할 게 없다. 일어나서 걷다가 쉬다가 걷다가 쉬다가 해도 된다. 그거 자체가 귀중한 시간이다.
2014년에 5개월 동안 실크로드 여행 다닐 땐 진짜 힘들었다. 나라가 바뀔 때마다 어느 국경으로 넘어야 하고 환율 어떻게 되지를 고민해야 하니까. 이곳 정보들은 <론리 플래닛>에도 잘 안 나왔다. '어디 가서 어느 방향으로 히치하이킹 하세요' 하는 식이다. 그래서 그때는 항상 신경이 곤두서 있었는데 이번 산티아고를 걸으면서는 불면증도 나았다. 사람이 30km씩 걷는데 어떻게 안 자고 배기겠나. 또 걱정 근심이 없으니까 불면증이 나았던 것 같다."
"여행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연습할 수 있는 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