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부고 교사 신분증
박도
그 이유를 알게 된 교장 선생님이 그 타개책으로 나를 발탁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 해결책은 말로서는 되지 않고, 오직 공정성과 투명성이라는 판단으로 모든 것을 공개적이며 투명하게 처리하고자 노력했다.
심지어 보충수업 수당 지급 결재 서류를 그대로 복사해 게시판에 올렸다.
내가 그 결재서류를 작성해 교감선생님에게 올릴 때 교감은 나에게 "수고가 많다"며 내 수업시간을 서너 시간 더 올리라고 넌지시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은 '쥐약'이라는 것을 알고 미동치 않았다.
나의 공정성과 투명성은 곧 효과가 나타났다. 서무실 납부창구가 붐빌 만큼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교장 선생님은 신학기 첫 주부터 주례 중·고 교감·교장 회의를 중·고 교무부장·교장 회의로 바꿨다. 그러자 이는 하극상으로 학교의 중요 일에 교감은 교무부장을 통해 교장에게 전달하고, 교장은 지시사항을 교무부장 회의를 통해 교감에게 전달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는 교감 선생님에 대한 불신임이었다. 그런 불신임을 당하면서도 교감은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고(그분은 1998년 2월 28일 정년퇴임 때까지 22년 동안 그 자리를 고수했다), 교장선생님은 더 이상 칼을 뽑지 못한 채 스스로 물러나기만을 기다리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아마도 내가 잘 모르는 뭔가 배경이 있는 듯했다.
나는 그렇게 1년을 보낸 뒤 학년말 교장선생님에게 보직 사의를 표했다.
"저를 포함하여 간부진을 개편하십시오."그 이튿날 교장선생님은 바람이나 같이 쐬자고 해 동행했더니, "그만둘 사람은 그만두지 않고, 함께 일 하고픈 사람은 그만두겠다고 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하소연이었다.
나는 그 말에 다시 1년간 보직을 더 맡았다. 그해 학년말에도 보직 사표를 냈지만 '한 번 맡았으면 3년은 해야 한다'는 말에 끝내 내 뜻을 관철치 못했다. 그런 가운데 3년째 되던 그해 가을 교장 선생님은 나에게 학교 일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입원했다. 처음에는 곧 퇴원할 줄 알고 시내 다른 대학병원에 아무도 몰래 입원했는데 병세가 악화되자 하는 수 없이 학교법인 산하 이대동대문병원으로 옮긴 뒤 이듬 해 2월 말에 승천하셨다.
세심하고 치밀했던 교장선생님그분은 평소 지병이 있는 데다가 학교일로 스트레스를 엄청 받으셨을 것이다. 층층시하 여인왕국에서 기관장으로 지내는 고통이 무척 컸었나 보다. 교장선생님은 유언무언 중 그런 애로사항을 내게 토로했다. 그분은 나의 건의를 받아들이거나 당신의 복안을 지시할 때도 매우 세심하고 치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