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생활 중의 김기설의 생전 모습(맨 우측)
참여사회
훗날 김기설의 동료들에게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조사를 맡고 있던 원진레이온의 산재 사망 노동자들과 속초 동우전문대 학생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무력감을 토로했다.
그 후 김기설이라는 이름은 의문사한 선배 김용갑과 함께 고상만의 삶에서 지울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그는 명함 앞면에 있던 이름 서준식을 찾아갔다. 그와 함께 인권 운동을 시작했고, 의문사 조사관을 거쳐, 고양시의 인권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은 군 의문사 가족을 위한 연극 '이등병의 엄마'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기금을 모금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1987년 6월과 1991년 5월 그리고 2017년
올해는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난 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이후 군사정권의 재집권과 3당 합당이라는 민의의 왜곡에도 불구하고 미완성으로 남은 민주화의 잔열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자유, 평등, 노동, 통일, 인권의 언어가 비로소 움트기 시작한 광장을 일시에 밀실로 가둬버린 대표적 사건이 1991년 유서대필 조작 사건이다. 검찰이 주도하여 김기설이 남긴 유서를 그의 동료 강기훈의 대필로 날조한 이 사건은 당시 강경대 군을 비롯한 11명의 젊은 희생들을 지워버렸을 뿐 아니라, 1987년의 광장이 요구하고 꿈꿨던 민주적 체제를 결정적으로 굴절시킨 사건이 되었다.
30년의 세월이 흘러 대한민국의 헌법과 민주주의는 지금 응급실에 있다. 광장이 사라진 곳에서 '대의' 되어온 민주주의는 그것이 누구를 대표했는지를 적나라하게 증명하고 있다. 검찰을 필두로 한 공안기관들은 인권과 시민권을 지우는 공권력 만능 국가를 만들었고, 이를 토대로 언론과 자본 그리고 비선세력들이 국가와 사회 전체를 농단하는 양극화 체제를 만들어 냈다.
역사가 하나의 사건, 한 사람의 희생만으로 돌변할 리 없다. 역사는 그 사건과 희생을 목격하고 기억해 온 사람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공명한 파장들의 총합으로 무심히 갱신될 뿐이다. 매해 열리는 '민족민주 열사 희생자 범국민 추모제'는 공권력에 희생된 사람들을 집계해왔다. 4.19혁명과 광주민중항쟁 희생자를 제외한다면, 1987년 이한열이 희생될 때까지의 희생자들(100명, 1959~87년)보다 그 이후 1991년까지 생긴 희생자들(113명, 1987~91년)이 더 많다는 사실은 의외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2016년 김기설의 묏자리는 남양주 마석공원에서 이천의 민주화운동기념공원으로 이장되었다. 그러나 반세기 전, 김기설이 서강대 옥상에 두고 온 재킷 안주머니의 유서는 새로운 독해를 기다리며 그대로 있다. 그해에 두고 와버린 보편적 인권의 가치,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외면하고 배제해온 소수자들의 목소리들도 여전히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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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설, 1991년 5월 8일에 두고 온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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