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초고본의 모습(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전시)
정만진
④난중일기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고, 또 일기답게 개인의 내면과 감정을 솔직하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이 자신의 내면과 감정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낸 부분은 원균에 관한 내용이다. '사실일까?' 의심이 될 만큼 원균은 아주 나쁘게 묘사되어 있다. 이순신은 '음흉' 등 갖가지 표현을 써서 원균을 비난했는데, 가장 단적인 것은 칠천량 해전 얼마 전인 1597년 5월 8일자 일기이다.
'원균이 수하 아전을 육지로 심부름 보내놓고는 그 아내를 사통하려 했다. 그러나 그 아내는 원균이 기를 써도 따라주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런 원균이란 자가 온갖 꾀로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또한 나의 운수로다. 원균이 나를 헐뜯기 위해 쓴 글은 너무 많아 말에 얹혀 조정으로 보내질 정도로, 그 짐이 서울길에 잇닿았을 지경이다. 그렇게 나를 헐뜯는 짓이 날이 갈수록 심하니, 그저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이 외에도 <난중일기>에는 원균의 나쁜 모습이 즐비하다.
1593년 2월 28일, 원균이 어부들의 목을 찾고 있으니 황당하다.3월 2일, 원균의 비리를 들으니 더 더욱 한탄스러울 따름이다.5월 14일, 원균이 함부로 말하고 사람을 속이니 모두 분개했다.5월 21일, 원균이 거짓 공문으로 군사들을 속이니 정말 흉측하다.5월 24일, 중국 화전을 원균이 혼자 쓰려 꾀를 내니 우습다.5월 30일, 위급한 때에 원균 등이 계집을 배에 태우고 논다.6월 10일, 원균이 흉계와 시기 가득 찬 편지를 보내왔다.6월 11일, 원균이 술에 취해 정신이 없더라고 한다.7월 21일, 원균이 흉측한 흉계를 냈다.8월 2일, 원균이 나를 헐뜯어 망령된 말로 떠드니 어찌 관계하랴!8월 6일, 원균은 걸핏하면 모순된 말을 하니 우습고도 우습다.8월 7일, 원균은 항상 헛소문 내기를 좋아하니 믿을 수가 없다.8월 19일, 원균은 음흉하고 하는 짓이 그럴 듯하게 남을 속인다.8월 26일, 원균이 음흉하고도 도리에 어긋난 말을 하여 해괴했다.8월 28일, 원균이 와서 음흉하고 간사한 말을 많이 내뱉었다.8월 30일, 원균은 참으로 흉스럽다고 할 만하다.9월 6일, 하루 종일 원균의 흉측스러운 일을 들었다.1594년 1월 11일, 원균이 취해서 미친 말을 많이 했다. 우습다.1월 19일, 원균이 남들이 마음에 둔 여자들과 몽땅 관계했다.2월 18일, 원균이 심하게 취해서 활을 한두 번밖에 못 쏘았다.3월 3일, 원균의 수군들이 우스운 일로 매를 맞았다고 한다..3월 5일, 장수들이 이야기하는 중 원균이 오자 가버렸다.3월 13일, 원균이 거짓으로 왜군 노릇한 놈을 목 잘라 바쳤다.4월 12일, 원균이 미친 듯 날뛰니 모두들 무척 괴이쩍어 했다.6월 4일, 임금의 꾸짖는 분부가 내려왔으니 원균 때문이다.8월 30일, 원균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니, 천년의 한탄이다. 9월 4일, 활을 쏘았는데 원균이 아홉 푼을 져서 술에 취해 갔다.10월 17일, 순무어사가 원균이 거짓말을 많이 한다고 이야기했다.1595년 2월 20일, 원균의 악하고 못된 짓을 많이 들었다.2월 27일, 원균이 너무도 무식한 것이 우습기도 하다.1597년 5월 2일, 진흥국이 눈물을 흘리면서 원균의 일을 말했다. 5월 5일, 한산도에서 원균이 한 못된 짓을 많이 들었다. 5월 7일, 한산도에서 음흉한 자(원균)가 한 일을 많이 들었다. 5월 8일, 음흉한 원균이 편지 조문을 했다. 5월 11일, 소문들이 많이 들리는데 모두 흉물의 일이었다. 5월 20일, 체찰사(이원익)가 '흉물 탓에 나랏일이 걱정'이라 했다.5월 23일, 체찰사가 원흉의 그릇된 일에 대해 분개했다.5월 28일, 하동현감이 원균의 하는 짓이 엄청 미쳤다고 말했다.6월 17일, 도원수(권율)가 원균의 거짓된 짓을 많이 말했다.6월 19일, 도원수는 통제사(원균)의 일이 말이 아니라고 했다.6월 25일, 원균이 적은 한 놈도 못 잡고 먼저 두 장수를 잃었다.7월 21일, 노량에 이르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되,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났다. 여러 장수들도 힘써 뭍으로 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것은 대장(원균)의 잘못을 말한 것인데 "입으로는 형용할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씹어 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박현모의 원균에 대한 평가 |
박현모는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난중일기>에서 '인간 이순신에게서 발견되는 인상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원균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다. 원균에 대한 이순신의 감정은 복합적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원균은 이기적이고 무식한데다 부패한 장수였다. (중략) 하지만 이런 이순신의 원균에 대한 평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할 것 같다. 근래 원균에 대한 재평가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그를 무능하고 부패한 인간 말종의 장수로 매도해서는 곤란하겠기 때문'이라면서 '실제로 1596년에 서울로 압송된 후 처형되기 직전의 이순신을 구해낸 정탁도 어전회의에서 원균을 "쓸 만한 장수"라고 평가했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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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원균을 42회 이상이나 일기에 좋지 않게 올렸다. 연도별로 보면 특히 1593년에 17회, 1594년에 11회, 1597년에 12회 집중적으로 나쁘게 썼다. 1592년, 1595년, 1596년에는 나쁘게 쓴 적이 전혀 없거나, 혹은 거의 없었다.
1592년은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경상우수사 원균이 조선 수군의 지휘권을 공동으로 행사하면서 왜적을 무찌른 시기였다. 1596년은 원균이 충청병사로 재직하여 수군이 아니었고, 1595년은 원균이 충청병사로 옮겨간 해였다.
1593년은 이순신과 원균이 3도수군통제사 자리를 놓고 다툰 해였다. 1594년은 원균보다 나이가 젊은 이순신이 3도수군통제사로서 조선 수군 전체를 지휘한 해였다. 1597년 5월 이후는 감옥에 갇혔던 이순신이 3도수군통제사로 다시 돌아온 시기였다.
선조 왈 "이순신과 원균은 물과 불의 상극"1594년 11월 12일 선조의 발언은 두 사람의 사이가 얼마나 나빴는지에 대한 대표적 증언이다. 선조는 극단적인 말을 남겼다. 선조는 "두 사람은 물과 불의 상극이기 때문에 전쟁 중에도 서로 구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서로 해칠 것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