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인지문흥인지문이라는 이름은 되찾았지만 흥인구로의 구 지명 변경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문화재청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일제가 물러갔다. 이에 따라 일제가 바꾸어 놓은 여러 것들을 다시 우리 고유의 것으로 되돌리는 작업이 속속들이 시행된다. 우선 민중은 창씨개명으로 강제된 일본식 이름에서 벗어나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다. 곧바로 일제식 명칭인 경성부가 서울시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으며, 이듬해엔 일본식 통(通), 정(町) 등의 명칭이 우리식 동(洞), 로(路)로 바뀌게 된다. 꿈에도 그리던 해방을 맞은 민중은 곧바로 조국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봄으로 향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민중의 꿈은 1950년 반민특위의 좌절과 함께 철저히 짓밟힌다. 일제 강점기, 기득권을 위해 매국행위를 일삼던 친일세력은 안정과 안보를 내세운 이승만 정권의 비호 덕에 살아남고, 일부는 권력의 요직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정계, 재계, 문화계뿐만 아니라 국문, 사학까지 친일파들이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이중에서도 특히나 서정주가 주도한 국문학계, 이병도가 주도한 사학계는 일제가 민족성 말살을 위해 그토록 열심히 왜곡하려 노력한 분야라는 점에서 가장 문제가 심각하였다.
일제가 자기들 멋대로 바꾸어 놓은 지명의 복원 또한 이로 인해 더욱 더디어졌다. 정부는 서울시와 같이 나라의 얼굴이 되는 지명은 급하게 바꾸었지만, 일제가 남긴 지명을 전반적으로 조사하고 고유 지명을 복원해 내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사실 일제 때의 지명은 그저 행정구조상의 개편, 그들이 호명하는 방식의 편의를 위해서 바뀐 거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일제가 지명을 바꾼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민족성 말살을 위한 것이었다. 즉, 이는 창씨개명(創氏改名)과 같은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며, 실제로 그 계획의 이름 또한 창지개명(創地改名)이었던 것이다. 왜곡된 민족혼을 온전히 되살려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 또한 친일청산의 실패와 궤를 같이 한다.
해방 후에도 본래 이름 찾지 못한 '흥인지문'이 때문에 아직까지도 우리는 일제식 지명을 아무렇지 않게 일상 속에서 사용하고 있다. 가장 단적인 예로, 동대문구와 서대문구의 명칭이 그렇다. 행정상의 편의로 인해 방위개념을 선호하던 일제로 인해 인의예지의 4가지 덕목을 나타내던 우리 사대문의 명칭 또한 일제 강점기 때 바뀌었다.
해방 후 보물 1호로 지정된 이후에도 흥인지문은 본래의 이름을 찾지 못하고 동대문으로 불리었다. 자연스레 그 이름을 딴 구의 명칭인 동대문구도 사람들 입에 굳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역사바로세우기라는 개혁과제를 내세운 김영삼 정권 때인 1996년도가 되어서야 흥인지문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그러나 당연히 그와 함께 흥인구로 바뀌어야 했을 구의 이름은 바뀌지 않고 여전히 일제식 이름으로 남아있다.
경희대학교 시민교육 1조(2016년 12월 시작한, 시민교육 강좌 수강 학생 5명의 모임)가 제기한 민원제기에 동대문구청은 '동대문구의 명칭 변경에 대한 사회경제적인 비용에 대한 고려 및 지역주민들의 충분한 공감대 형성을 통한 사회적 합의 부족 등으로 동대문구의 명칭이 그대로 존치된 것으로 사료됨'이라고 답했다.
그 외 방위 개념을 사용한 다른 구의 명칭들 또한 일제식 잔재이다. 강북, 강서, 강남, 강동 등의 지명들 모두가 현재 서울 내 24개의 구 이름들 중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이는 대표성이나 포함성 등을 전혀 지니지 못한다. 강남구 외 강동구, 강서구 모두 한강의 이남에 있다.
서울시 내 지명의 30%가 일제식, 종로구는 60%구 아래 단위로 들어가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한국땅이름학회 배우리 명예회장(현 국토교통부 국가지명위원회 위원)의 연구에 따르면, 현재 서울시 내 지명의 30%가 일제식이며, 종로구의 경우 60% 달한다고 한다.
일제는 지명을 간소화하기 위해 동을 통합하면서 여러 이름에서 글자 하나씩을 따다 붙이는 방법을 많이 사용했다. 종로구 관광의 중심인 인사동은 조선시대 이 지역이 속했던 관인방(寬仁妨)의 인(仁)자와 본래의 동 이름이었던 사동(寺洞)의 사(寺) 자를 따다가 1914년 일제 강점기 때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 때에 붙여 만든 이름이다. 이리해서 유학의 인(仁)과 이곳에 원각사를 포함한 절이 많았다 하여 붙여진 불교식 글자인 사(寺)가 같은 이름 속에 포함된 아이러니를 낳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인사동의 지명유래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입에 올리고 있으며, 종로구청과 인사동의 공식 소개글 또한 1914년이라는 연도만을 말할 뿐, 일제에 의해 왜곡된 지명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필자가 인사동을 답사해보니, 대부분의 가게 이름들이 인사동이라는 지명을 이용하고 있었으며 고유식 지명인 사동이라는 지명을 사용한 가게는 거의 없었다. 그 외에도 합정(合町)이라는 명칭의 한자 또한 본래 조개우물이 있었던 마을이라는 뜻의 의차로 조개 합(蛤)자를 사용했으나 일제의 입맛대로 합할 합(合)자로 바뀌어 합쳐진 우물(?)이라는 이도저도 아닌 의미로 바뀌었다. 또한 명동(明洞)의 명자 또한 명치 즉, 메이지의 일본식 한자를 따다가 동에 가져다 붙힌 이름이다.
일제가 남기고 간 잔재임을 숨기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