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리본공작소광화문 한켠에 마련된 노란리본 공작소
(2017. 01. 05)
한인정
- 나에게 세월호란?"호스피스 병동 로비음악회, 문화사역자로 자원봉사를 해본 적이 있어요. 오지 음악회 등으로 청년들 데리고 가서 제 주머니도 잘 털지만, 남의 주머니도 잘 털어요. 기획안 써서 가지고 가서, 음악하는 친구들 경비라도 대줄 수 있도록 지원금을 얻어오는 거죠. 그래서 소외된 지역도 찾아가고 했던 거죠.
그런데 세월호를 만나면서 조금 제 인생이 뒤집어졌다고 할 수 있어요. 세월호는 정치와 기업과 결탁해서 아이들의 꿈을 물거품을 만든 거죠. 부모들이 17년 이후에 아이들을 못 보는 거잖아요. 아이들을 키우면서 한 살, 두 살의 역사가 없어진 거죠. 이젠 엄마가 아이들 시집보낼 수도 없고, 손자를 볼 수도 없어요. 손자들 학교 가는 것도 못 보고요. 이 아이들이 대학가는 것을 엄마, 아빠들이 못 보는 거예요.
부끄러운 말일지 모르지만, 광우병 촛불집회 때 죄송하게도 저는 '고기 안 먹으면 되지, 고기 먹는다고 다 병 걸리는 건 아니잖아' 그렇게 생각했어요. 지극히 개인주의예요. 정치에도 관심도 없었어요. 잘 모르니까. 투표하라고 종이 오면, 누가 조금 더 나쁜 짓을 덜했나. 그냥 그 정도였어요.
그런데 세월호 터지고 왔다갔다하면서 보니 내가 죄인인 거예요. 내가 무관심했고, 나와서 함께하지 못했던 것들이 죄로 다가오는 거예요. 부끄러운 어른으로 산 거예요. 나는 나름대로 잘 산다고, 세상에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몸부림쳤는데 그저 울타리 속에서 살아온 거죠."
-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이 있으신지요.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해요. 잊지 않고 기억하고, 끈질기게 싸워서 바꿔야 돼요. 우리가 이승만 정권이 들어왔을 때 일제에 부역한 사람을 뽑기 위해 반민특위가 만들어졌죠. 그런데 그게 폐기됐어요. 내보내야 할 사람들이 명칭만 바뀌었지요. 제대로 항거해보지 못했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 정점을 찍어야 돼요. 절대로 물러서면 안 돼요. 이제 시민특조위가 결사되는데, 끝까지 가야 돼요. 내 자식들에게는 세월호 이전처럼 교육시킬 수 없고, 키울 수 없어요.
물론 바꾸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죠. 몇몇 유가족들이 영국과 독일을 다녀왔는데 어떤 사건이 밝혀내지기까지 36년의 시간이 걸렸데요. 완벽히 책임을 묻고 해결하는데 말이죠. 세월호가 36년이 가면 안 되죠. 제가 살아있는 동안 해결해야 합니다. 앞으로 리본공작소에 많은 후원 부탁드려요. 가능하면 물품으로, 에바지(EVA), 본드, 군번줄 등을 구매해서 보내주시면 좋겠어요."
세월호 1000일을 맞이하며세월호 집회에 나가면 '미안해'라는 피켓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왜 미안했을까. 어쩌면 그녀의 답처럼 우리도 무관심해서, 그냥 나만 이곳에서 살아남으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해왔기 때문에 더욱 미안한 감정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많은 이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라며 노란 리본을 달고 있다. 노란리본은 7살 아이의 손에서, 엄마의 손에서, 나이와 성별에 상관 없이 모인 모든 미안한 시민들의 손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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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원 가져와 노란 리본 만들어달란 아이들, 역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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