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지성계를 대표했던 동경삼재의 모습. 왼쪽부터 나이순으로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
산처럼
동경삼재의 엇갈린 선택 1920년대 일제의 문화통치가 시작되면서 이들 셋은 점차 어긋나기 시작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사장 겸 주필로 활동하던 이광수는 돌연 귀국하더니 친일 논조를 띤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가 1922년에 발표한 <민족개조론>은 조선인들에게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그는 합법적 민족운동을 주장하며 독립투쟁에서 한 발 물러서는 태도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3·1운동에 참가한 이들을 '무지몽매한 야만인'이라고 비난했던 것이다.
최남선 역시 일제의 조선사 왜곡에 맞서 독자적인 조선학 개척에 앞장섰으나 끝내 조선총독부 산하 단체인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면서 변절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조선과 일본 사이의 민족적 혈통은 동일하지 않지만 문화적으로 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본의 신도(神道)가 동방민중의 정신적 최고 문화가치를 지켜왔기 때문에 조선, 만주, 몽골 등 동일문화권의 민족들이 그에 귀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때 민족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이들의 변절은 친일지식인의 대명사 윤치호조차 혀를 내두르게 만들 정도였다. 윤치호는 1934년 8월 15일자 일기에서 최남선을 가리켜 "한때 청년들의 우상이었는데 지금은 암적인 존재로 전락했다"고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반면 홍명희는 달랐다. 그는 신간회 해산으로 민족운동이 침체되자 단체 활동이 아닌 개인의 문학 활동으로 눈길을 돌렸다.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지는 않았지만, 붓으로서 민족운동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이 시기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임꺽정전>의 집필이 있다.
그러나 홍명희는 연재를 여러 차례 중단해야만 했다. 저자는 그것을 홍명희 스스로의 선택으로 보고 있다. 계속해서 저술활동을 할 경우 사회적 명망이 높은 자신에게도 일제가 부역을 요구할 것이 예상된 상황에서, 자칫 이광수와 최남선처럼 될까 두려워 스스로 붓을 꺾으며 지조를 지키고자 했다는 것이다.
민족지도자에서 매국노로 변신한 최남선·이광수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의 수탈도 심화됐다. 전선이 불리해지자 일제는 마침내 조선인 청년들을 전쟁터로 강제동원하기 시작했다. 독립선언문을 작성하며 조선인 청년의 궐기를 촉구하던 이광수와 최남선은 이제 동포 청년들에게 천황을 위해 전선으로 나가 죽을 것을 권유하는 매국노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그들은 '선배격려단'이라는 이름으로 한반도와 일본을 순회하며 동포 청년들에게 학병으로 나갈 것을 독려했다.
사회적 명사의 변절은 어떤 방향으로든 대중에게 크나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이들의 혹세무민에 당대 조선 청년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저자는 당시 학도병으로 끌려갔던 유학생들의 증언을 함께 수록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학병 출신 신상초는 이들의 학병 권유 연설을 듣고서는 "주먹으로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동족의 선배였기에 참았다"고 회고했고, 윤종현 역시 "밖에서 역적의 무리 이광수 나오라고 외치며 누군가 단도를 휘두르며 이층으로 오르락내리락 대소동을 벌였다"고 증언했다. 이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조선인 청년들은 선동에 흽쓸리기는커녕 오히려 분명한 문제의식을 갖고 격렬하게 반대의사를 드러냈음을 알 수 있다.
친일, 왜 당신들이 그 역할을 해야만 했는가꿈에 그리던 해방이 왔다. 숨어 지내며 처사로서의 지조를 지키던 홍명희는 환국한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새 조국 건설에 앞장섰다. 반대로 친일 문인의 낙인이 찍힌 최남선과 이광수는 지조를 잃고 일제에 부역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둘은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해 설치된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됐다. 최남선이 집필한 역사학 교재는 정부 당국에 의해 교과서 사용금지 처분이 내려졌다. 비로소 세상이 바뀌는 듯 했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이승만 정권에 의한 탄압으로 반민특위 활동 자체가 위축됐다. 일제에 부역한 관료들이 이승만 정권의 비호 아래 대한민국의 관료로 부활했다. 결국 최남선과 이광수는 무혐의로 풀려나왔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친일 청산'이라는 담론은 아예 수면 아래로 잠겨버리고 말았다. 최남선과 이광수에게는 생명의 동아줄이 내려온 셈이었다. 기회를 놓칠세라 이광수는 <나의 고백>이라는 자서전을 집필하며 자신의 반민족행위를 정당화하는 정교한 변명을 쏟아냈다.
"제 몸을 팔아서 아버지의 고난을 면케 하려는 심청의 심경밖에 있을 것이 없었다. 다른 친일파는 어떠한지 몰라도 내가 하려는 친일은 돈이나 권세나 명예가 생기는 노릇은 아니었다. (…중략…) 민족을 위해서 산다고 자처하던 나로서 마지막으로 할 일이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 이광수, <나의 고백>그들의 저서가 지속적으로 팔리는 것도 문제였다. 최남선의 교재는 문교부의 사용금지 처분에도 불구하고 일선 학교 현장에서 남몰래 교재로 채택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에 힘을 얻은 최남선은 "내가 친일파인가 아닌가는 나의 저서가 굉장히 잘 팔리는 것으로 보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당당하게 주장하기까지 했다.
저자는 동경삼재의 삶과 선택에 대한 평가를 자제한다. 철저히 관찰자의 입장에서 그들을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대신 그들이 생전에 남긴 구술과 행적, 그들과 함께 호흡했던 지인들이 남긴 평가, 당대의 시대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면서 독자의 판단을 유도하고 있다.
동경삼재의 선택이 옳았는가 틀렸는가는 결국 책을 읽는 독자가 스스로 판단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미건조하게 느껴질 정도로 사실만을 나열하던 저자도 "내가 아니면 누군가 나서야했기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이광수의 변명 앞에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나보다. 저자는 그들에게 묻는다. "그 역할을 왜 당신들이 해야만 했느냐"고.
부역자들에 대한 단죄, 이제라도 분명히 해야우울한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반복되고 있다. 비선 실세 최순실의 딸 정유라에게 비정상적 특혜를 제공한 혐의로 류철균 이화여대 교수가 구속됐다. 그는 소설가 이인화라는 필명으로 대중에게 더 친숙하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규명하기 위해 열린 청문회에서는 최경희 전 이화여대 총장을 비롯해 정유라를 둘러싼 의혹의 중심에 선 교수들이 모조리 불려 나왔다.
그들은 한결같이 특혜 의혹을 부정하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러나 특검 수사가 급물살을 타며 그들의 거짓말이 슬슬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식인으로서의 지조와 양심을 잃은 채 표류하는 스승과 이를 규탄하는 이화여대 학생들에게서 최남선과 이광수 그리고 그들에게 분노한 조선인 청년들이 겹쳐 보이는 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
어쩌면 일제에 부역한 이들을 단죄하지 못한 우리의 역사가 오늘날 지식인들의 변절을 부추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진상규명도 흐지부지 끝나서는 안될 것이다. 불의한 권력에 부역한 이들을 낱낱이 까발리고 그들을 단죄함으로써 부끄러운 고리를 끊어내는 것. 역사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명징한 교훈이자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