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에 발생한 해전. 서울시 용산구의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정유재란으로부터 360년 뒤. 1957년, 이때도 정유년이었다.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가 '한 건'을 크게 했다. 2015년에 아베 총리가 오바마 대통령과 공동성명을 발표한 것처럼, 아베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총리도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미일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대한민국이 이승만 독재로 시끄럽고 야당이 대통령에 대한 경고 결의안을 발의하던 그 해에, 기시 총리는 미일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미일동맹 강화 및 자위대 활동범위 확대를 위한 행보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그 해에 일본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이 되었다. 전쟁 범죄를 일으켰으니 죄인처럼 살아야 할 나라가 패전 12년 만에 미국의 도움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정유년엔 좋은 일도 있었다. 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해 고구려를 세운 일로 인해 고구려와 동부여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같은 혈통이면서도 서로 으르렁댔다. 그런데 동부여에 남아 있던 주몽의 어머니, 유화가 세상을 떠나면서 양측 관계에 해빙의 바람이 불었다. 기원전 24년, 정유년의 일이다. 기원후에는 정유년이 항상 7로 끝나지만, 기원전에는 항상 4로 끝났다. 지금 우리가 쓰는 서양식 양력을 기준으로 할 때 그렇다.
동부여 정부는 유화의 장례식을 태후(대비)의 장례식으로 치르고, 유화의 사당도 신당 즉 신을 모시는 사당으로 인정했다. 격하게 감동한 주몽은 사신을 보내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얼어붙은 민족 내부가 이로 인해 따스해졌다.
체제가 불안정해진 1177년 정유년서기 817년 정유년에는 국가의 존재의의를 보여주는 일이 있었다. 흉년으로 농업생산이 감소하여 불경기가 되자 굶주려 죽는 백성이 많았다. 그러자 신라 헌덕왕은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지방정부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쌀을 나눠준 것이다. 백성들의 세금과 병역으로 살아가는 정부로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사건들은, 21세기 대한민국을 사는 사람의 눈에 확 들어오는 사건들이다. 다른 시대에 사는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 있건 간에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는 객관적 잣대로 지난 2500년간의 정유년을 다시 돌아보았다. 체제가 강화됐느냐 불안정해졌느냐 아니면 별다른 변화가 없었느냐를 기준으로 정유년을 되돌아본 것이다.
그랬더니 정유년은 중국·일본에 비해 한민족 쪽에서 상대적으로 변화가 많은 해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민족 내부 상황은 한민족의 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고, 외부 상황은 그것을 강화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 대신 한민족이란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은,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때와 같은 시기를 일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다.
기원전 504년부터 2016년까지 정유년은 총 42회 있었다. 이 42회의 정유년을 '체제 강화냐 체제 불안정이냐'의 관점으로 분류하면, 이런 수치가 나온다. 민족 내부 상황이 체제를 강화시킨 해는 4개년, 불안정하게 만든 해는 9개년, 특별한 변화가 없었던 해는 29개년이다. 외부 상황이 민족의 체제를 강화시킨 해는 7개년, 불안정하게 만든 해는 3개년, 특별한 변화가 없었던 해는 32개년이다.
서기 517년에는 KBS 드라마 <화랑>의 배경인 신라에서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신라 중앙정부가 지방 군사권을 흡수하고 국방의 중앙집권화를 이룬 것이다. 이 해에 병부 즉 국방부가 창설된 것이 그 증거다. 이것은 신라의 국가체제 혹은 질서를 강화시키는 요인이었다.
고려 무신정권 때인 1176년에는 충남 공주의 명학소란 천민 구역에서 망이·망소이의 신분해방운동이 터졌다. 이 민중반란이 1177년 정유년에는 한층 더 격렬해졌다. 반군이 개경까지 진격하겠노라고 호언장담할 정도였다. 결국 진압되기는 했지만, 이것은 신분질서를 위협하고 흔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1177년 정유년은 체제가 불안정해진 해였다. 이런 체제 불안정은 서민대중한테는 긍정적인 신호였다.
조선 1717년 정유년, 전염병과 기근이 심각조선 숙종 때인 1717년 정유년에도 체제 불안정의 신호가 커졌다. 이 해에는 전국적으로 전염병과 기근이 심각했다. 역병이 도는 데에다가 농업생산마저 감소했다. 흉작은 다음해까지 이어졌다. 조세수입 부족으로 호조(재정경제부)의 경비가 고갈될 지경이었다. 나라에 돈이 부족해지는 것은 사람으로 치면 혈액 순환에 장애가 생기는 것과 같다. 1717년 정유년의 조선 숙종 정부는 '혈액 고갈'로 어려움을 겪었다.
정유년에는 민족 내부 상황이 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경우가 좀 더 많았지만, 외부에서 발생한 상황은 정반대로 작용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체제를 강화시키는 경우가 좀더 많았다. 일본이 전쟁을 재개한 1597년 정유재란의 인상이 강렬하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체제를 강화시키는 요인이 외부에서 많이 발생했다.
일례로, 서기 37년에는 고구려가 중국의 낙랑군을 침공하여 없애자, 그곳 주민들이 신라로 대거 귀화했다. 고구려가 전쟁에서 승리한 것도 좋은 일이지만, 신라로 난민들이 유입된 것도 좋은 일이었다.
오늘날에는 난민이 자기 나라에 유입되는 것을 꺼리지만, 고대에는 달랐다. 고대에는 인구밀도가 낮아 토지보다 노동력이 더 필요했기 때문에, 난민이 유입되면 산업생산이 증가하고 국가 재정이 좋아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37년 사건은 신라에 좋은 일이었다. 이런 일은 217년과 337년의 고구려에도 있었다.
397년에는 고구려가 만주의 거점 중 하나인 요동성을 점령하는 일이 있었다. 중국의 분열을 틈타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광개토태왕(태왕이 정식 칭호)이 이룩한 성취였다. 고대의 왕들은 전쟁 전에 점을 치는 일이 많았으므로, 광개토태왕 역시 "정유년에 잘될 것"이라는 확신 속에 전쟁을 벌여 그런 성취를 얻어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