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궁궐 경호부대의 수문장 교대의식을 재현하는 모습. 경복궁 흥례문 앞.
김종성
권력의 중심부에 40년 산 유자광이때 유자광은 호위병 신분인데도 과감한 행동을 했다. 세조에게 직접 상소문을 올려, 자신을 출전시켜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병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누구라도 자원하면 북방 전투현장에 배치될 수 있었다. 그래서 바로 위의 상관한테 요청해도 됐을 일을, 유자광은 굳이 임금한테 건의했다.
이 일을 계기로 세조에게 신임을 받고 승진한 이래로, 유자광은 세조시대는 물론이고 세조의 아들인 예종·성종과 손자인 연산군 때까지 계속해서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리고 세상의 질시와 비판을 받는 속에서도 항상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다.
이 과정에서 유자광은 권세를 할 목적으로 질 낮은 행동을 많이 했다. 세조가 죽은 직후에는 멀쩡한 청년 장군인 남이를 역모죄로 몰면서 정국을 주도했고, 연산군 때는 신진 유림파(사림파)의 정신적 지주인 김종직이 청년 시절에 쓴 수필을 문제 삼아 공안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선비들이 목숨을 잃거나 귀양을 떠났다. 그 유명한 무오사화다.
세조 시대에서 연산군 시대까지 약 40년 동안 유자광은 가끔 정치적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지만, 머리가 좋고 공안사건 조작의 귀재였기 때문에 세조와 그 아들과 손자의 신임을 받으며 정권 중심부에서 권세를 지킬 수 있었다.
이렇게 임금에게 잘 보이고 신임을 받는 방법으로 세상살이를 하던 유자광이 1506년 9월 18일에는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했다. 임금을 배신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연산군의 무서운 폭정과 음란한 사생활 때문에 백성들은 물론이고 신하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팽배해가던 1506년, 그래서 연산군 정권이 서서히 가라앉던 1506년. 이때 유자광은 남들보다 먼저 그 선박에서 나오기로 결심했다.
16세기 문신인 이정형의 <동각잡기>에 따르면, 눈치 빠른 유자광은 1506년 9월에 박원종이 주도하는 쿠데타 계획에까지 가담했다. 그의 머리와 능력을 아는 쿠데타 지도부가 먼저 제안을 했다. 왕을 배신하고 함께할 용의가 있느냐고 제안한 것이다.
제안을 받은 유자광은 고민을 오래 하지 않았다. 아주 신속하게 대답을 내놓았다. 왕을 배반하겠다고 응답한 것이다. 신속히 반응한 것을 보면, 제안을 받고 답변을 하기까지의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여론의 움직임이나 '대통령 지지율', '새누리당 지지율' 등을 떠올리며 쿠데타의 성공 가능성을 나름대로 계산했을 것이다.
유자광의 출생 연도는 정확히 모른다. 그래서 1506년에 정확히 몇 살이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왕실 호위병으로 있다가 권력 중심부에 들어간 지 약 40년이 지난 뒤였으므로, 1506년 당시에는 나이가 꽤 들었을 것이다. 김기춘보다는 적었을 수 있고, 이정현과는 비슷했을 수 있고, 우병우보다는 많았을 것이다.
'친박' 유자광이 쿠데타 모의에 가담했으니, 쿠데타 멤버 중에서 이 사실을 늦게 통보 받은 사람들은 무척 당황했을 것이다. 불안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선지 쿠데타 지도부는 그에게 다시 한 번 다짐을 받았다. <동각잡기>에 따르면, 지도부는 유자광에게 "만약에 숨어버리거나 머뭇거리면 때려죽이겠습니다"라고 위협했다. 이렇게 기분 나쁜 경고를 받고도, 유자광은 걱정 말고 자기를 믿으라고 안심시켰다.
그런 뒤에 그는 쿠데타 당일인 9월 18일 연산군을 몰아내는 데 앞장섰다. 군복까지 입고 말에 올라탄 그는 궁궐 대문을 장악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쿠데타 시작 전부터 경복궁 광화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오늘날 촛불집회의 열기가 활활 타오르는 광화문 앞에서 510년 전의 유자광은 주인을 배반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