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9호 현오국사탑비 뒤로 광교산 능선이 보이는 풍경.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몰려와 절을 불태운 것으로 전해진다.
정만진
전쟁이 일어난 임진년(1592) 4월, 경상도는 일본 침략군이 휩쓸고 지나갔지만 전라도에서는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 이순신의 수군, 김시민의 진주성, 곽재우·김면·정인홍 등 경상우도 의병들의 분투에 힘입은 덕분이었다. 도내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여유가 생긴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은 군사 8천을 이끌고 당당하게 북상할 수 있었다. 이광은 근왕(勤王), 즉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기 위해 출정한다는 거대한 명분을 내걸었다
하지만 전라도 군이 공주에 이르렀을 때 이미 선조는 북쪽으로 피신했고, 한양은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광은 그냥 군사를 물리고 말았다. 그런데 무기력하게 후퇴한 자신을 두고 전라도 사람들의 민심이 들끓었다. 군사를 8천 명이나 데리고 간 관찰사가 왜적들의 코빼기도 안 보고 돌아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여론이었다.
게다가, 전라도방어사 곽영(郭嶸)의 조방장 백광언(白光彦)이 칼을 뽑아들고 "공께서는 중병(重兵, 많은 군대)을 거느렸으면서도 싸우지 않으니 무엇 때문이오?" 하며 눈을 부릅떴다. 이래저래 이광은 마음이 불안했다. 그는 부랴부랴 백광언에게 재출전을 약속했다.
이광, 임금의 명을 받고 서울로 재출발
심대(1546∼1592) |
본관은 청송. 자는 공망(公望), 호는 서돈(西墩)으로, 1572년(선조 5)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박사·수찬을 지내고, 1584년 지평에 이르렀다. 이때 동서의 붕당이 생기려 하던 시점이었는데, 그는 언관으로서 붕당의 폐단을 논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근왕병 모집에 특별히 노력하여 선조의 큰 신임을 받았다. 우부승지·좌부승지를 지내며 선조를 평양에서 의주로 호종했다. 같은 해 9월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서울 수복 작전을 계획, 삭녕에서 때를 기다리던 중 왜군의 야습을 받아 전사했다.
왜군은 그의 수급을 서울 거리에 전시하였는데, 60일이 지나도 산 사람의 모습 그대로였다고 전해진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며, 공신으로 책봉된 교서(1607년)는 보물 1175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완장리 361-2(처인성로827번길 116-5)에 있는 그의 묘소 또한 경기도 기념물 3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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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때 전라도 감영에는 선조가 보낸 심대(沈岱)가 와 있었다. <선조실록> 1592년 5월 3일자에 따르면 선조는, 이광이 병사들을 이끌고 올라오다가 공주에 이르러 경성이 벌써 함락되고 임금도 서쪽으로 피란을 갔다는 소문을 듣고 철수하여 내려갔다는 소식에 크게 실망해 있었다.
선조는 날마다 남쪽을 바라보며 이광의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감감 무소식이었다.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尹先覺) 역시 오지 않았으므로 선조는 개탄을 거듭했다. 이때 심대가 스스로 남쪽으로 내려가 이광에게 왕명을 전달하겠다고 자청했다. 선조는 매우 기뻐하면서 심대에게 '경이 남쪽 군대를 불러온다면 국가를 경과 함께 하겠다'라고까지 칭찬했다.
그 무렵은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끊긴 상황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재소(行在所, 임금의 임시 거처)에서 호남까지 오가는 것은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아주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두려워했다. 그러나 심대는 배를 타고 한강을 거쳐 바다로 전주까지 가서 이광에게 왕명을 전하는 용기를 발휘했다. 심대에게 심한 질타를 들은 이광은 다시 출병하겠노라 맹세했고, 심대는 평양에 있는 선조에게 돌아와 복명(復命, 결과 보고)했다.
다시 군사 2만을 모은 이광은 광주목사 권율 등을 대동하여 5월 2일 북진했다.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의 8천 군사와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의 몇 백 군사들도 온양으로 집결했다. 3만 명을 넘는 대군이 형성되었다.
충청도 군사는 수원으로, 전라도 군사는 수원 동쪽 용인으로 올라갔다. 백광언이 "아군이 비록 숫자는 많으나 오합지졸입니다. 이렇게 한데 모아놓으면 크게 패할 수도 있습니다. 각 고을의 수령들로 하여금 자신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10여 곳에 분산 주둔했다가 전투가 벌어졌을 때 서로 돕게 하면 대첩은 못할지언정 대패 또한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의견을 제시했지만,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며 덤빈 데 대한 앙금이 남아 있던 이광은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광은 백광언의 건의를 묵살해버린 다음, 전군을 두 부대로 나누어 전진하게 했다.
<선조실록> 1592년 6월 21일자에 따르면, 이광, 김수, 윤선각은 함께 선조에게 "신들이 기병·보병 (군대의 규모를 부풀려) 6만여 명을 거느리고 이달(5월) 3일 수원에 진을 쳤는데 양천의 북포를 건너 군사를 진군하려 합니다. 앞뒤 양쪽에서 들이치는 계책을 급히 지휘해 주소서" 하고 장계를 띄웠다.
하지만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은 이 기사 끝에 '김수 등이 행군해 올 때 규율이 없어 앞뒤가 서로 호응하지 못했다. 선봉 백광언·이지시(李之詩) 등은 땔나무 하고 물 긷는 왜적 10여 급을 참한 뒤 왜적을 가볍게 보고 교만한 기색을 띠었다. 김수는 이미 여러 차례 패전하여 수하에 군사도 없고 기운이 꺾인 상태였으며, 이광은 본래 용렬하고 겁이 많아 계책을 세워 대응할 바를 몰랐기 때문에 조정에 명령을 청한 것'이라고 혹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