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지키기 집회, 무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

소수 '보수파'가 다수 '진보파'를 제압했던 해방직후와는 상황이 다르다

등록 2016.12.22 16:58수정 2016.12.22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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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모 등, 헌재앞 '탄핵 반대' 대규모 시위 지난 17일 오전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부근 안국역앞에서 박사모 등 박근혜 대통령 지지자들이 “탄핵반대” “국회해산” “종북척결” 등 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열고 있다.
박사모 등, 헌재앞 '탄핵 반대' 대규모 시위지난 17일 오전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부근 안국역앞에서 박사모 등 박근혜 대통령 지지자들이 “탄핵반대” “국회해산” “종북척결” 등 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열고 있다.권우성

촛불이 거대하게 타오르자, 그 옆에서 맞불도 함께 피어오르고 있다. 맞불이라지만, 진짜 불은 아니다. 태극기다. 태극기를 흔들어 촛불집회의 열기를 끄기 위한 운동이 맞불집회란 이름으로 전개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맞불집회의 진짜 동기는 다른 데 있는 듯하다. 박근혜가 죽을죄를 지었다는 것을 맞불집회 참가자들이라고 모를 리가 없다. 실은 박근혜가 걱정돼서가 아니라 촛불로 인해 세상이 바뀌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보는 게 정확할 것 같다.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 하에 매주 수십만에서 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는 촛불집회에 비하면, 맞불 집회는 규모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지난 17일 천도교 수운회관 앞에서의 맞불집회에서는 "촛불을 꺼버리고 대한민국의 헌정질서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자신감 넘치는 발언까지 나왔다.

하지만 객관적 조건을 볼 때, 맞불이 촛불을 끌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참가자 숫자만 갖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몇 가지 요인들이 더 있다. 해방 직후와 지금의 상황을 비교해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해방 직후, '소수' 보수파의 승리가 가능했던 이유

해방 직후에는 진보와 통일의 가치를 지지하는 국민들(편의상 진보파)과 보수 및 분단의 가치를 지지하는 국민들(보수파) 사이에서 심각한 대립이 있었다. 이 대결은 후자의 승리로 끝났다. 승리한 쪽은 패배한 쪽을 빨갱이나 좌파로 몰아세우며 자신들의 승리를 정당화했다. 맞불집회 참가자들이 촛불집회 쪽을 종북 세력으로 모는 것처럼 해방 직후의 보수파도 그랬다.

동아시아학 권위자인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 제8장에서 해방 직후 한국의 진보파를 이끈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급속한 세력 확장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반도 전역에 수백 개의 지방 조직을 퍼뜨린 조직의 재능을 누가 발휘했는지 정확히 알기란 어렵다"면서 "(이들이) 불과 수주 사이에 농촌 조직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서술했다. 농업 중심의 당시 한국에서 건준이 농촌을 지배했다는 것은 이들이 한국을 사실상 지배했다는 말과 같다.


또 커밍스는 산꼭대기의 봉화나 숲속의 북소리 등을 이용해 전국적 네트워크를 형성한 진보파의 연락전달 체계를 설명하면서, 보수파는 그런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반대파들이 산에 봉화를 올려서 그들이 기대하는 결과를 얻을 수는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촛불집회 참가자들의 SNS 이용 능력을 맞불집회 쪽이 따라잡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방 직후에는 진보파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보수파에 대한 지지를 압도했다. 진보파는 숫자 면에서뿐만 아니라 조직력 면에서도 보수파를 압도했다. 그래서 정상적인 경우라면, 해방 직후의 한국은 진보와 통일의 가치를 향해 달려갔어야 했다.


그런데 승리한 쪽은 보수파였다. 소수의 '맞불'이 다수의 '촛불'을 꺼버렸던 것이다. 보수파 입장에서는 기적의 연출이었다. 이게 가능했던 데에는 해방 직후의 독특한 정치적 환경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해방 직후에는 북한의 토지개혁이나 정치 숙청 등으로 인해 남한으로 월경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휴전 때까지 발생한 월남민의 숫자와 관련하여, 140만 명이라는 주장도 있고 500만 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중에서 한국전쟁 이전까지 월남한 사람의 숫자는 80만 명이라는 주장이 있다. 어느 수치가 맞든 간에 상당수의 월남민이 발생한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북한 체제에 불만을 품고 남하한 사람들의 일부는, 보수와 분단의 가치를 지지하는 쪽에 줄을 섰다. 그중 일부는 서북청년단 같은 폭력적 청년단체를 구성하고 진보파에 대한 테러 활동을 전개했다. '맞불'에 가세해서 '주먹'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서북청년단 등이 아무리 무서운 폭력성을 가졌다 해도, 남한 땅에 재산도 없고 별다른 연고도 없는 그들이 남한 사회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1948년 당시의 서북청년단.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1948년 당시의 서북청년단.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그런데 미군정과 이승만 집단(1948년부터는 이승만 정권)이 경찰·기업·언론을 움직여 서북청년단 등을 후원하면서 변화가 생겼다. 남한 사회를 지배하는 주요 세력이 보수파를 지원하면서, 진보파를 이길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미국과 이승만이 서북청년단 등을 내세워 진보파 진영을 제압하는 과정에 관해, 저명한 언론인인 고 리영희는 <대화>라는 대담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한에 잔존했던 악질적인 반역자들과 친일파들이 이북에서 도피해온 같은 부류의 악질분자들과 결탁하여 남한 사회를 장악해버렸던 겁니다. 이북에서 도피해온 그런 부류의 청년들이 서북청년단이란 것을 결성해 미군정과 경찰의 비호하에 온갖 테러와 불법행위, 폭력을 자행하고 있었어요."

제주 4·3항쟁으로 대표되는 해방 직후의 진보적 대중운동이 처참한 패배로 귀결된 것은, 이렇게 미군정·이승만·경찰·보수언론·기업의 지원하에 서북청년단 등의 폭력적 맞불 운동이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해방 직후의 맞불운동은 미군정·이승만·경찰·보수언론·기업 및 일부 월남민들의 가세에 힘입어 숫자의 열세를 극복하고 촛불을 끌 수 있었다. 미군정과 이승만이 법적 정당성을 부여해주고 경찰이 무장력을 빌려주고 보수언론이 분위기를 띄워주고 기업이 돈을 제공하는 가운데 일부 월남민들이 행동대장으로 나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국 정부, 언론, 기업, 트럼프... 모두가 맞불을 외면한다

박사모 등, 헌재앞 '탄핵 반대' 대규모 시위 지난 17일 오전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부근 안국역앞에서 박사모 등 박근혜 대통령 지지자들이 “탄핵반대” “국회해산” “종북척결” 등 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열고 있다.
박사모 등, 헌재앞 '탄핵 반대' 대규모 시위지난 17일 오전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부근 안국역앞에서 박사모 등 박근혜 대통령 지지자들이 “탄핵반대” “국회해산” “종북척결” 등 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열고 있다.권우성

그런 조건들이 2016년의 촛불 정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선, 미국부터가 그렇다. 1940년대 후반의 트루먼(Truman) 대통령처럼 한국 내정에 간여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진 미국 대통령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트루먼과 발음이 비슷한 트럼프(Trump) 차기 대통령은, 한국 정권이 어떻게 되는가보다는 미국의 개입으로 인해 돈이 얼마나 들 것인가를 먼저 고려할 것이다. 철저하게 돈을 따지는 그는, 맞불 세력이 물질적 이익을 제공하지 않는 한 한국 정세에 섣불리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돈이 생기는 일이라 하더라도, 이미 진즉에 미국은 한반도 내정에 간여할 힘을 잃었다. 그래서 트럼프도 이 문제에는 개입할 수 없다. 

또 한국 정권의 상황도 해방 직후와 다르다. 박근혜 정권은 이승만 정권처럼 경찰력을 동원해 맞불세력을 도울 만한 처지가 아니다. 지금 그는 '어떻게 하면 임기라도 채우고 나갈까'를 고민하기에도 벅차다.

보수언론 역시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한동안은 촛불집회를 열심히 보도하던 보수언론이 최근에는 맞불집회를 띄워주려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지만, 지금처럼 보수파가 정치적 명분을 잃은 상황에서 보수언론의 편파적 태도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거기다가 SNS 여론형성 체계가 기존 언론을 견제하고 있기 때문에 보수언론이 분위기를 뒤집기는 쉽지 않다. 

해방 당시 같았으면 어느 한쪽을 편파적으로 지원했을 경찰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경찰이 촛불과 맞불의 중간에 서서 충돌을 막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는 사실에서도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다. 지금 경찰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성숙한 의식을 가진 국민들을 상대로 "성숙한 시민의식, 여러분이 지켜주십시오"라는 주제넘은 충고를 하는 것뿐이다.

 경찰의 폴리스라인
경찰의 폴리스라인김종성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해방 당시에는 미군정과 이승만의 제안을 받고 서북청년단 등에 금전을 제공했지만, 지금의 재벌들은 그럴 만한 처지가 아니다. 재벌 역시 박근혜 정권 못지않게 성토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해방 직후처럼 민심을 거스르면서까지 정치에 개입할 수 없다.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국민들 앞에서 "앞으로는 잘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라고 읍소하는 것뿐이다.

이처럼 지금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해방 직후와 상황이 다르다. 소수의 맞불이 미국·정권·경찰·보수언론·재벌의 힘을 빌려 다수의 촛불을 짓밟는 일이 지금 상황에서는 재연되기 극히 힘들다. 그래서 촛불을 꺼버리자는 발상은 실현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신성한 태극기를 촛불 같은 인화성 물질 앞에 들이대면서 촛불을 끄겠다고 시도하는 것은 태극기를 모독하는 일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맞불집회 #촛불집회 #서북청년단 #박사모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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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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