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모 등, 헌재앞 '탄핵 반대' 대규모 시위지난 17일 오전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부근 안국역앞에서 박사모 등 박근혜 대통령 지지자들이 “탄핵반대” “국회해산” “종북척결” 등 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열고 있다.
권우성
촛불이 거대하게 타오르자, 그 옆에서 맞불도 함께 피어오르고 있다. 맞불이라지만, 진짜 불은 아니다. 태극기다. 태극기를 흔들어 촛불집회의 열기를 끄기 위한 운동이 맞불집회란 이름으로 전개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맞불집회의 진짜 동기는 다른 데 있는 듯하다. 박근혜가 죽을죄를 지었다는 것을 맞불집회 참가자들이라고 모를 리가 없다. 실은 박근혜가 걱정돼서가 아니라 촛불로 인해 세상이 바뀌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보는 게 정확할 것 같다.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 하에 매주 수십만에서 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는 촛불집회에 비하면, 맞불 집회는 규모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지난 17일 천도교 수운회관 앞에서의 맞불집회에서는 "촛불을 꺼버리고 대한민국의 헌정질서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자신감 넘치는 발언까지 나왔다.
하지만 객관적 조건을 볼 때, 맞불이 촛불을 끌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참가자 숫자만 갖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몇 가지 요인들이 더 있다. 해방 직후와 지금의 상황을 비교해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해방 직후, '소수' 보수파의 승리가 가능했던 이유해방 직후에는 진보와 통일의 가치를 지지하는 국민들(편의상 진보파)과 보수 및 분단의 가치를 지지하는 국민들(보수파) 사이에서 심각한 대립이 있었다. 이 대결은 후자의 승리로 끝났다. 승리한 쪽은 패배한 쪽을 빨갱이나 좌파로 몰아세우며 자신들의 승리를 정당화했다. 맞불집회 참가자들이 촛불집회 쪽을 종북 세력으로 모는 것처럼 해방 직후의 보수파도 그랬다.
동아시아학 권위자인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 제8장에서 해방 직후 한국의 진보파를 이끈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급속한 세력 확장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반도 전역에 수백 개의 지방 조직을 퍼뜨린 조직의 재능을 누가 발휘했는지 정확히 알기란 어렵다"면서 "(이들이) 불과 수주 사이에 농촌 조직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서술했다. 농업 중심의 당시 한국에서 건준이 농촌을 지배했다는 것은 이들이 한국을 사실상 지배했다는 말과 같다.
또 커밍스는 산꼭대기의 봉화나 숲속의 북소리 등을 이용해 전국적 네트워크를 형성한 진보파의 연락전달 체계를 설명하면서, 보수파는 그런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반대파들이 산에 봉화를 올려서 그들이 기대하는 결과를 얻을 수는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촛불집회 참가자들의 SNS 이용 능력을 맞불집회 쪽이 따라잡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방 직후에는 진보파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보수파에 대한 지지를 압도했다. 진보파는 숫자 면에서뿐만 아니라 조직력 면에서도 보수파를 압도했다. 그래서 정상적인 경우라면, 해방 직후의 한국은 진보와 통일의 가치를 향해 달려갔어야 했다.
그런데 승리한 쪽은 보수파였다. 소수의 '맞불'이 다수의 '촛불'을 꺼버렸던 것이다. 보수파 입장에서는 기적의 연출이었다. 이게 가능했던 데에는 해방 직후의 독특한 정치적 환경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해방 직후에는 북한의 토지개혁이나 정치 숙청 등으로 인해 남한으로 월경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휴전 때까지 발생한 월남민의 숫자와 관련하여, 140만 명이라는 주장도 있고 500만 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중에서 한국전쟁 이전까지 월남한 사람의 숫자는 80만 명이라는 주장이 있다. 어느 수치가 맞든 간에 상당수의 월남민이 발생한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북한 체제에 불만을 품고 남하한 사람들의 일부는, 보수와 분단의 가치를 지지하는 쪽에 줄을 섰다. 그중 일부는 서북청년단 같은 폭력적 청년단체를 구성하고 진보파에 대한 테러 활동을 전개했다. '맞불'에 가세해서 '주먹'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서북청년단 등이 아무리 무서운 폭력성을 가졌다 해도, 남한 땅에 재산도 없고 별다른 연고도 없는 그들이 남한 사회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