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광해군의 묘. 왕릉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한 이 무덤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정만진
그뿐이 아니었다. 백성들은 몰려다니면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에 차례차례 불을 질렀다. 병조판서를 역임한 홍여순의 집에도 거침없이 방화를 했다. 평소 백성들의 원성을 한 몸에 받았던 형조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노비 문서를 관리하는 장예원도 시커멓게 재로 변해서 내려앉았다. 궁궐을 호위하는 군사들은 일찌감치 모두 달아나버렸고, 궁궐 문에도 자물쇠가 달아나고 없었다.
<선조실록> 1592년 4월 29일 : 이날 밤 호위하는 군사들이 모두 달아났고, 궁문엔 자물쇠가 채워지지 않았으며, 금루(물시계)는 시간을 알리지 않았다. 궁궐 타오르는 불빛이 선조 일행의 등을 비추었다. 불빛은 빗물 위를 둥둥 떠 다녔다. 궁궐이 활활 타면서 토해낸 불빛은 깊은 밤 칠흑 같은 빗속의 도성 내부를 그런대로 걸을 만하게 만들어 주었다. 선조와 대신, 그리고 내시까지 다 합해도 겨우 100여 명에 지나지 않는 도피 일행은 불빛을 등진 채 철벅철벅 물길을 걸었다.
비는, 선조가 벽제역을 지나 혜음령(고양시와 파주군 광탄면 경계)에 닿자 더욱 세차게 쏟아졌다. 일행 중 시종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신들까지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하나 둘 종적을 감췄다. 왕을 따라가 봐야 고생만 할 뿐,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쯤은 삼척동자라도 다 눈치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선조 일행이 임진강에 도착한 때는 천지사방이 암흑에 캄캄하게 파묻힌 뒤였다. 율곡의 후손들이 강변의 정자 화석정에 불을 질러 어둠의 기운을 죽였다. 그러자 불빛이 강 북쪽까지 비추어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강을 건넌 선조가 말했다.
"나루는 끊고, 주위의 인가도 남김없이 철거하라. 배들도 구멍을 뚫어 가라앉혀 버려라."
진작 불태워 버렸으므로 왜적들이 화석정을 뜯어 뗏목을 만들 일은 없어졌지만, 인가도 남겨둘 것이 아니었다. 무엇이든 남겨두면 적들은 그것을 활용해 도강 시간을 줄일 것이다.
"참으로 세심하고도 영명하신 분부이십니다."누군가가 선조의 비위를 맞추느라 얄팍한 아부를 일삼는다. 하지만 그 꼼꼼하고도 지혜로운 어명 탓에 일행 중 반은 결국 강을 건너지 못하고 말았다.
개성을 버리고, 또 평양도 버리려는 선조다음날인 5월 1일, 개성에 당도했다. 다시 한 달 뒤인 6월 10일, 선조는 평양도 버리고 다시 북쪽으로 가려 했다. 백성들이 극심하게 반발했다. 백성들은 도끼와 몽둥이를 들고 선조 일행을 가로막았다. 백성들의 방화로 서울에서 집을 잃은 홍여순은 이번에도 민중의 몽둥이질에 맞아 말에서 떨어지는 망신을 당했다. 그래도 홍여순은 군사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반역자들의 목을 베어라! 감히 임금의 앞을 가로막아?"군사들이 주저하자 홍여순은 직접 칼을 휘두르며 윽박질렀다.
"말을 듣지 않으면 네놈들부터 죽이겠다!"지켜보고 있던 류성룡이 평안감사 송언신을 강하게 질타했다.
"어째서 난민들의 행동을 진정시키지 못하는가?"송언신이 그 길로 주동자 셋을 골라 대동문 앞에서 공개 처형한 후 목을 창공에 내걸었다. 비로소 길이 열렸다. 그 사이로 선조 일행이 재빨리 빠져나가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