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민주진보당 민주주의연구소 국장 페이 위가 가운데 앉은 채로 발표하는 모습. 왼쪽은 스와하라 다케시, 오른쪽은 정치발전소 김형근.
청년허브
페이 위는 민진당 일원으로써 젊은 의원들을 위한 플랫폼을 만들었다.
"대만에서 초선의원이 되는 것은 정말 어렵다. 경쟁도 치열하다. 이는 청년이 국정에 참여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해준다."
페이 위의 말이다. 그래서 그가 기획한 것은 '풀뿌리'였다. 커뮤니티 위원회를 만든 것인데, 선거에 관심 있는 젊은이들이 민진당에 가입하지 않고도 정치활동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청년이 정당 활동은 아니어도 사회의 변화와 개혁은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해바라기 운동'을 통해 확인한 덕분이다.
집권 국민당 누르고 민진당 약진 성과결과는 놀라웠다. 국민당 의석은 15개에서 6개로 줄었다. 반면 민진당은 6개에서 13개로 늘어났다. 국민당 역사상 최악의 패배였다. 페이 위는 "사회를 변화시키자는 젊은 층의 열기가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고 들려준다. 78%에 달한 20~30대 투표율이 정치혁명을 일궜다.
페이 위는 "원래 젊은 층 투표율은 지방의 경우 50% 정도인데, 올해 2016대선에서 20대 투표율은 74%나 됐다"고 소개한다. 그 배경은 무엇일까. "20대는 자신을 대만사람이라고 여겨 친 중국 성향의 국민당 정책에 반감이 크다"고 짚어준다. 대만인의 정체성이 정치세력화로 연결됐다는 분석이다.
해바라기 운동 전에 자생력 있고 강한 '산딸기' 운동'해바라기 운동'은 사실 '산딸기 운동'에 뿌리를 둔다. 2008년 중국의 관료들이 대만을 방문했을 때 대만 정부는 시위 지역 제한, 대만 국기 감추기 등의 조처를 내렸다. 이에 청년들이 반기를 들었다. 폭력사태가 벌어졌고, 경찰이 시위대를 처음으로 강제해산하자 무려 50만 명의 학생들이 들고일어났다. 그리고 스스로 '산딸기족'이라고 불렀다.
스트레스에 약하고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딸기 세대라는 별명에 맞서 자생력 있고 강하다는 뜻에서 '산딸기'라 이름 붙였다. 전국에서 대학연합 시위가 일었고, 그때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를 통해 수백 명 단위의 작은 규모까지 널리 홍보할 수 있었다. 그동안 대만 언론은 학생 목소리를 보도하지 않아 청년 스스로 자신들의 주장과 힘을 공유할 수 없었다. 인터넷이 이를 해결해 줬고, 그 '산딸기' 운동의 성과가 '해바라기' 운동으로 이어졌다.
과거 개인 문제를 이젠 사회전체 공동 문제로 인식페이 위는 "과거에 청년들은 본인이 겪는 문제를 개인 차원으로 돌렸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사회문제로 인식해 공동으로 풀어야 할 정치 개혁의 과제로 본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만 정치에서 청년 정치의 한계가 아직은 분명하다. 페이 위는 "정치에 관심 갖는 대만 젊은이들의 영향력은 앞으로 더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하지만 홍콩의 네이션 로처럼 선거에 직접 나가지는 못한다"고 아쉬움을 드러낸다. 정당에서 서포터 역할만 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페이 위의 말에 대만 청년 정치, 나아가 민주주의의 발전에 대한 소망이 묻어난다.
"대만에서 젊은 후보를 만나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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