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묘 대성전 정면 현판 생민무유(生民未有)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공자와 같은 사람은 태어나지 않는다’
김기동
한나라 시대(BC 136년) 사상가 동중서가 공자의 유학 사상을 처음으로 발전, 개량, 변형시켰습니다. 그래서 동중서가 만든 유학을 중국에서는 '한대유학','신유학'이라고 부릅니다. '신유학'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동중서의 '신유학'은 공자의 사상과 차이가 큽니다.
한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한무제는 봉건 통치를 확고히 하여, 자신의 후손들이 안정적으로 영원히 한나라 황제 지위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한무제의 심중을 꿰뚫은 사상가 동중서가 한무제의 입맛에 맞게 만든 사상이 바로 '한대유학''신유학'입니다.
동중서는 공자의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대목이 마음에 들었는가 봅니다. 그래서 '삼강오상'을 만듭니다. '삼강오상'에서 '삼강(三綱)'은 세 가지의 기본 뼈대가 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공자의 유학 사상에서 임금과 신하는 각각 자신의 본분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상호관계였는데, 동중서의 '신유학'에서는 임금이 신하의 뼈대가 될 만큼 우위에 위치하는 상하관계로 바뀝니다.
'삼강' 중에서 부위자강(아버지는 자식의 기본 뼈대)(父爲子綱)과 부위부강(남편은 아내의 기본 뼈대)(夫爲婦綱)은 영원히 지속되는 가족관계를 말하기에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강' 중에서 군위신강(君爲臣綱)에서 말하는 통치자와 부하의 관계는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론적으로 완벽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동중서는 군위신강(君爲臣綱)에서 군(君)이 의미하는 황제를 영원 불변의 지위로 만들기 위해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하늘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참고로 한국사람이 공자라는 말을 들으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삼강오륜'은 공자 말씀이 아닙니다. '삼강'은 한나라 동중서가 만들었고, '오륜'은 맹자가 만들었습니다.
동중서는 군위신강(君爲臣綱)에서 군(황제)(君)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 하늘(天)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동중서는 세상을 올바르게 이끌어가는 초자연적인 무엇인가가 있으며, 그 초자연적인 무엇이 하늘(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늘(天)이 세상을 관리하는데, 바로 이 하늘의 아들이 천자(天子), 즉 황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황제는 사람이긴 하지만, 하늘의 아들 천자(天子)이기 때문에 하늘의 명령을 대신하여 통치하는 신성불가침한 지위를 가지게 됩니다.
주위 사람들이 황제도 사람인데 어떻게 하늘의 아들이냐고 의심하자, 동중서는 음양오행설을 인용하여 천인감응설(天人感應設)을 만듭니다. 황제는 하늘과 대화하며 하늘의 뜻에 따라 세상을 통치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황제의 권위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황제의 명령이 곧 하늘의 뜻이니 신하는 황제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이야기지요.
중국에서는 동중서의 천인감응설(天人感應設)을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이라고도 부릅니다. 중국에서는 통치자의 호칭이 왕이 아니라 황제니까, 황권신수설(皇權神授說)이 맞겠네요.
한나라 황제 한무제 입장에서는 동중서의 이런 '신유학'사상이 마음에 쏙 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한무제는 '신유학'을 국가의 기본사상으로 정하게 되고, 동중서의 '신유학'은 그 후 중국 봉건사회의 전통사상이 되어 이천 년 동안 이어집니다.
한나라 한무제는 이런 '신유학'사상의 기초를 제공해 준 공자가 너무 고마워서, 공자를 성인(聖人)으로 추켜 세웠습니다. 한무제는 그것으로도 부족했던지 성인 공자를 다시 신(神)의 반열까지 올립니다. 공자가 신의 반열에 오르게 되자 학문인 유학(儒學) 사상도 종교인 유교(儒敎)로 불리게 됩니다.
그 후 모든 중국 황제는 황제가 하늘의 명에 따라 세상을 통치한다는 동중서의 '신유학'사상을 통치이념으로 합니다.
중국 명나라 교지와 조서(봉건시대 통치자가 신하에게 주는 임명장과 국가정책 지시서) 첫 문구는 항상 '하늘의 뜻을 황제가 전한다'라고 시작합니다. 하지만 황제가 하늘의 뜻을 대신해 신하에게 명령한다는 사실을 신하들이 믿지 않자, 좀 더 적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방법으로 황제의 권위를 세우게 됩니다.
명나라는 황제의 교지나 조서를 신하에게 전달할 때, 교지나 조서를 넣은 상자를 끈으로 매달아 승천문(현재의 중국 천안문)에서 아래로 내려보내고, 신하는 승천문 아래에서 두 무릎을 꿇고 마치 하늘의 명을 받듯이 두 손으로 받게 됩니다.
여담으로 승천문에서 끈에 매달린 상자를 아래로 내려보내던 관리가 실수로 끈을 놓쳐 상자가 땅에 떨어져 깨지는 일이 발생하자, 하늘의 뜻을 제대로 땅에 전하지 못한 관리를 죽일지, 살릴지 하는 처벌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인 기록도 있습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초자연적인 하늘의 일이나 사람이 죽은 후의 일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일을 해결하는 이데올로기로 '인(仁)'이라는 사상을 만듭니다. 하지만 한나라 한무제와 동중서는 하늘을 인정하고 하늘의 신이 황제와 대화(감응感應)한다는 '신유학'을 만듭니다.
공자가 다시 살아나 '신유학'을 만든 동중서를 만난다면, 본인을 신의 반열에까지 올려주어서 고맙다고 말할지 아니면 이것들이 내 이름을 팔아 무슨 엉뚱한 짓을 한 거지라며 욕할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공자 유학과 불교, 도교가 융합한 성리학1100년대 후반 남송시대 주희가 또 한 번 공자의 유학 사상을 크게 발전, 개량, 변형시킵니다. 당나라 멸망 후 약 100년간의 혼란한 시기를 수습하고 통일 왕조를 세운 송나라 역시 유학을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습니다.
이 시기에는 이미 우주의 생성과 자연의 질서를 설명하는 불교와 도가 사상도 유행하였습니다. 하지만 공자의 유교 사상은 사람의 현실 생활에 대해서는 잘 설명하지만, 그러한 현실이 현재의 모양을 갖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초자연적인 하늘의 일이나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공자의 유학에서는 당연한 일이지요.
이런 철학적인 한계를 극복하고자 나온 사상이 바로 주희의 성리학입니다. 한국에서는 성리학이 곧 유교로 알려졌지만, 중국에서는 '신유학' '이학'이라고 부릅니다.
인도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중국은 이미 인도 불교 사상에 자신들의 도가 사상을 융합시켜 선불교라는 중국만의 독특한 불교를 만든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공자의 유학 사상을 기초로 하고 여기에 불교와 도교의 사상을 빌려와 이기론(理氣論) 사상을 기초로 하는 새로운 '신유학'을 만듭니다.
주자학의 중심이 되는 이기론(理氣論)에서 이(理)는 불교의 화엄철학에서 빌려온 이론이고, 기(氣)도 이전까지의 유학에서는 없던 개념으로 중국에서는 도교 사상에서 빌려온 이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1900년대 초반 중국 최고 학자인 양계초는 '성리학이란 표면은 유교이지만 속은 불교다'라고 말했습니다. 중국 바이두 신화사전에서도 이학(한국 성리학)을 '유교 학설이 중심이 되고 여기에 불교와 도교 이론이 같이 융합된 사상'이라고 설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