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육사 졸업 후 견습사관을 마치고 장교로 부임하기 직전의 박정희 전 대통령
정운현
허형식은 허위 선생의 사촌 동생인 허필(許苾)의 아들로 1909년 경북 선산(현 구미시)에서 태어났다. 1920년대 초 부친을 따라 만주로 이주한 그는 요령성 개원현에 살다가 1929년 하얼빈으로 이사하였다. 허형식은 스물 한 살 되던 해인 1930년 5월1일 '5·1절 시위행진'을 계기로 항일운동 전면에 등장하였다. 그는 한인청년 40여명을 규합하여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을 습격하였다.
이 사건으로 허형식은 '치안교란혐의'로 체포돼 봉천(奉天·현 瀋陽)감옥에 수감되었다. 여기서 그는 당시 북만(北滿) 지역 항일연군의 수령격인 조상지(趙尙志)와 중국 공산당 소속 항일운동가 김책(金策·전 북한 부수상 역임)을 만나면서 동북항일연군과 인연을 맺게 됐다. 김책의 소개로 1935년 1월 동북항일연군 제3군 산하 제2연대장에 부임한 그는 이듬해 부대 재편성으로 제3사(師)를 지휘하면서 일약 조상지 다음가는 지도자로 떠올랐다. 그의 나이 26세 때였다.
1936년 가을 일본군이 삼강성 일대의 항일세력 토벌에 나서자 그는 선발부대를 이끌고 일본군과 교전, 일본군 80여명을 사살하고 말 30여필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1937년 2월 북만지방의 항일연군회의가 열렸을 때 그는 북만 항일연군 총사령부 및 제3군의 전권대표로 이 회의에 참가했으며 이듬해 4월 제3·6·9·11군을 통합, 제3로군(路軍)이 조직되자 총참모장 겸 제3군 군장에 임명됐다.
1940년 그는 일본군의 군사거점인 풍락진을 습격하여 경찰국장을 사살하고 하얼빈 일대를 점령하여 관동군을 놀라게 하였다. 그가 지휘한 제3로군은 용남·용북 지방에서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300여회의 전투를 벌여 이 일대 27개 도시를 점령하였다. 자료에 의하면 제3로군은 기차역 5곳, 일본의용대훈련소 5곳, 비행장 1곳을 습격하여 만주군과 경찰 1,557명을 사살했으며 기관총 7정, 박격포 4문, 기타 총기류 1,500여점을 노획한 것으로 나와 있다.
1940년대 들어 동북항일연군의 지도자 조상지와 양정우(楊靖宇)가 사망하자 대부분의 대원들은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소련 영내로 도피했다. 그러나 허형식은 만주에 남아 전구를 지키며 일제와 맞서 싸웠다. 그러던 중 그는 예하부대의 소분대사업을 검사하러 나갔다가 일본군 토벌대의 습격을 받고 최후를 맞았다. 그의 옆에는 동지 진운상도 쓰러져 있었다. 1942년 8월3일 오전 6시 43분이었다. 허형식은 33세로 청봉령 소릉하 계곡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허형식의 최후는 비참했다. 이튿날 그의 동지들은 전투현장에서 1km 떨어진 시냇가에서 아직 핏기가 남아 있는 사람의 다리뼈와 권총 한 자루를 발견했다. 일본군 토벌대는 그와 진운상의 목을 베어간 후 나머지 시신은 그대로 버리고 달아났다. 그의 시신은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밤중에 산짐승들이 몰려와 두 전사의 살점과 내장은 다 뜯어먹고 사라지자 이번에는 까마귀들이 몰려와 발기발기 발겨 먹었다. 동지들은 다리뼈만이라도 그곳에 묻어주고는 돌덩이로 무덤 표시를 해두었다. 허형식의 얼굴을 알지 못했던 일본군 토벌대는 전향한 이화당(제3로군 9군 군장)을 통해 허형식임을 확인하고는 쾌재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