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포되기 전 1967년 10월에 촬영된 미해군 첩보함 푸에블로 호의 모습
U.S. Navy-위키백과
이미 1.21 청와대 습격사건으로 발칵 뒤집힌 박정희 정권은 참을 수 없는 분노에 군사적 보복을 하려고 했지만, 미군은 쉽사리 응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불과 이틀 뒤 미 해군 소속 푸에블로 호가 나포되자 미군의 태도는 완전히 돌변했다.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호가 급파되고, 오키나와 주둔 주일미군이 한반도로 전진 배치되는 등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가 조성됐다.
이틀 전 동맹국 대통령의 목숨을 노린 습격사건에 대해 미온적이던 미군이었지만, 막상 자국과 직접 관련된 사건에서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다. 뿐만 아니라 이후 대한민국은 완전 배제된 채 북미 비밀회담으로 전개돼 갔으니,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시쳇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을 게다.
결국 11개월간의 협상 끝에 북한 영해를 침범했다는 사실 인정과 재발 방지는 물론이며, 푸에블로 호를 압수당하고 단지 포로와 유해만을 돌려받는 것으로 협상은 종결됐다. 덕분에 북은 그때 나포한 푸에블로 호를 평양 대동강으로 옮겨와 반미교육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게다가 당시는 베트남전쟁 시기였고 이때 북은 베트남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자국의 최첨단 첩보함이 북의 손으로 넘어간 것은 통신체계 등 1급 군사비밀이 적국에 넘어간 것과 마찬가지였다. 베트남전쟁에서 군사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본 것과 같다.
한편, 푸에블로호가 전시됐던 대동강 수면 아래에는 이미 또 다른 미국의 선박이 수장돼 있다. 1866년 미국의제너럴셔먼 호가 대동강으로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며 횡포를 부리자 평양사람들이 그 배를 불 지르고 수장시켰다. 이처럼 대동강 수면 위아래로 모두 미군의 배가 존재하고 있으니 미국으로서는 북한에 최고의 반미교양물을 제공한 셈이 되고 말았다.
두 사건을 통해본한반도 현실과 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