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여도> 속의 조계동 <동국여도東國輿圖)> '북한성도(北漢城圖)'에 표기된 조계동. 동국여도는 연대 작자 미상의 도별 지도첩으로 19C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장빈
9년간의 인질생활에서 풀려나 귀국한 소현세자는 결국 두 달도 더 버티지 못한 채 싸늘한 주검으로 변하고 말았다. 민심은 흉흉해졌고 독살설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불에 기름을 붓듯 인조는 세손을 제쳐두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연경(燕京)에 있다가 급거 귀국하여 일련의 참상을 목도한 인평대군은 이듬해 삼월, 삼각산 조계동에 별서(別墅)를 짓고 우렁찬 폭포소리에 몸을 맡긴 채 스스로 세상을 향한 문을 닫았다.
세상만사가 다 허공을 걷는 일처럼 부질없음을 알았던 것일까? 25살 젊은 인평대군은 폭포의 중허리를 가로 질러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보허각(步虛閣)을 세웠다. 돌다리 한쪽에는 영휴당(永休堂)을 세웠으니 피비린내 나는 권력의 암투 현장을 떠나 오직 물소리 외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산 속에서 마음 편히 살자고 함이었을까?
문득 당년의 보허각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폭포 중허리 양쪽을 연결하여 아치형 돌다리를 세우고 그 위에 정자를 올렸는데 뒤로는 나는 듯한 물줄기가 하늘에서 쏟아지고 앞으로는 광활한 마들평(노원평야)가 눈앞에 펼쳐지니 그야말로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의 선경 아닌 선경이었다.
그 밖에도 폭포 상단 암벽에 구천은폭이라는 글씨를 새기고, 또 폭포 주변에는 송계별업(松溪別業), 창벽(蒼壁), 한담(寒潭) 등의 글씨를 새겼다고 하나 지금은 구천은폭 네 글자만 완연한 옛 모습을 자랑하고 있을 뿐 나머지는 찾아볼 수 없다.
구천은폭 바위글씨는 한 글자 당 가로세로 70㎝ 크기로 전체 3미터 규모이다. 해서체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썼으며 오른쪽 하단에 이신(李伸)이라고 써서 글씨의 주인이 누구인지 밝히고 있다. 이신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
다만 인평대군의 1659년 연행기(燕行記)인 연도기행(燕途紀行)에, "당하관 전 현감 이신이 예방을 맡았다"라고 한 기록이 있다.
또 유본예의 한경지략(漢京識略)에 "흥화문은 경희궁의 정문으로 이신이 썼다"라는 기록이 있어 이신이 인평대군과 상당한 친분이 있었고 당대에 제법 이름 있는 명필이었음을 짐작해 보는 정도이다. 물론 두 책에 나오는 인물이 동일인이라는 전제하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