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0월 23일, 여순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진압군이 투입됐다. 해군 LST함이 여수앞바다 선상에서 시내를 향해 무자비한 박격포 공격을 하자 여수시내가 불타고 있는 모습. 그 모습을 군인들이 지켜보고 있다.
여수넷통 제공
여순사건이란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 주둔 국군 제14연대가 제주도 출동 거부를 기점으로 1955년 1월 23일까지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4.3사건 투입을 앞둔 14연대는 동족상잔 절대 반대와 미군 즉시 철퇴를 주장하며 출병을 거부했다. 무력 충돌이 일어났고 군인들은 정부군에 진압됐다.
이후 사건이 커졌다. 여수를 진압한 진압군은 10월 27일부터 대대적인 부역자 색출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다.
당시 악명 높은 제5연대 김종원 부대는 종산초(지금의 중앙초)에서 만행을 저질렀다. 즉석에서 일본도로 시민들의 목을 쳐 죽였다. 또 좌익색출이란 미명하에 우익들이 손가락 총으로 가담자를 지명하면 재판도 없이 즉결 처형했다.
오동도 동쪽 무인도(속칭 애기섬)에선 국민보도연맹원 110명이 총살당했다. 남면 안도에서도, 거문리 해안가와 인근 무인도에서도 총살당했다. 당시 헌병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희생자는 200여명이었다.
만성리에서도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여순사건 부역혐의자로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에 수용된 사람들 중 125명이 살해당했다. 증언에 따르면 5명씩 묶어서 총살한 후 장작위에 5명을 겹겹이 쌓아 5층으로 다섯 묶음을 만들어 화장시켰다. 당시 만성리 마을 주민들은 인육 타는 냄새로 곤욕을 치렀다 한다.
이들 희생자들의 묘엔 형제묘라는 이름이 붙었다. 희생된 시신들을 찾을 길 없던 유족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같이 있으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래서 여수의 아이들은 누구나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 "남들 앞에 나서지 말라"는 가정 교육을 받고 살았다. 여순사건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다.
14연대 주둔지에서 시작된 여순사건은 '이승만판 광주사태'에 비유된다. 지금의 세월호 사건에 비유하면 무리일까?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가 미신청자, 사건 이후 멸족 등을 고려하면 실제 희생자수가 2천여명을 넘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 이후 특별법 제정이나 보상, 사과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여수시도 조례제정조차 못하는 실정이다.
여순사건 전문가 주철희 박사는 "여순사건은 좌익으로 몰린 종북의 원조였다"면서 "이 사건이 국가보안법이 생긴 계기가 되었다"라고 말한다.
이날 송영길. 박주민 의원은 만성리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에 도착해 묵념을 올렸다. 이들은 위령비문에 아무런 글씨도 새겨지지 않은 것을 신기해했다. 비문 뒤에는 단지 '1948년 10월 10일 .... '이라고 비문을 세운 날짜만 달랑 적혀 있었다. '지금껏 아무것도 진상규명된 것이 없다'는 의미를 담은 묵언의 시위다.
조례제정 시급한 여순사건...시장이 나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