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1월 29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실에서 제3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한 뒤 굳은 표정을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이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박 대통령이 뼛속까지 철저하게 '국가주의자'라는 사실입니다. 국가주의자에게 최상의 가치는 체제의 안녕과 존속이며 정권의 유지입니다. 그들은 체제를 흔들림없이 지켜내는 것을 최고의 미덕이자 절대선으로 규정합니다.
문제는 국가주의자들에게 있어 국가의 개념이 일반인이 생각하는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즉, 그들은 국가를 국토, 국민, 정부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한 유기적 개념이 아닌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정권, 체제, 권력자 등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박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가 통치했던 유신독재시대는 국가주의자들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야만의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절 국가는 곧 박정희로 통했습니다.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었고, 그가 헌법 위에 군림하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쥐락펴락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인혁당 사건, 동백림 사건, 민청학련 사건 등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는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국가전복세력으로 몰려 목숨을 잃어야만 했습니다. 당시는 대통령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시민들을 구금, 구타, 투옥했던 서슬 퍼런 철권통치가 극에 달한 시절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국가를 곧 체제와 정권, 권력자로 인식했던 그 시절 권력의 심장부에서 온갖 특혜와 특권을 누렸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통치 철학과 국가관을 고스란히 전수한 것은 물론, 박정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던 국가주의자들에게 둘러싸여 권력을 마음껏 향유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박 대통령을 둘러싼 제반 환경은 그를 국가주의자로 성장시키는 최적의 조건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즉각적인 퇴진과 탄핵을 촉구하는 압도적인 국민 여론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물러나지 않겠다고 밝힌 대목이야말로 박 대통령의 국가주의자로서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박 대통령의 자격없음을 성토하며 당장 물러날 것을 촉구하고 있는데 그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버티겠다 말하고 있습니다. 언어도단도 이만한 언어도단이 없습니다. 박 대통령이 이해하는 국가와 국민의 개념이 시민들의 그것과 다르다는 방증입니다.
이날의 화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두번째 사실은 박 대통령이 대단히 심각한 '도덕 불감증'에 빠져 있다는 겁니다. 박 대통령은 회담을 통해 미르·K스포츠재단 모금이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며, 자신에게 제기된 의혹 모두는 최순실 개인의 비리라는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했습니다.
구속된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과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등 측근들이 박 대통령의 지시로 청와대 기밀문서를 최순실에게 유출하고, 재단 설립과 기금 모금에 나섰다고 증언했음에도 관련 사실을 극구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행위를 끝까지 선의라 주장하며 법리 공방으로 가보겠다는 심산입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행위가 선의에 의한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증거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습니다. 6일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에서는 재단 기금 모금에 강제성이 있었다는 증언이 기업인들로부터 직접 터져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