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 포장
이훈희
"부드러운 여자 두부"
마트에 반찬거리를 사러 가서 매대에서 이 상품을 봤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아마도 필자는 별 생각 없이 이 상품을 장바구니나 카트에 넣은 후 계산대로 향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상품의 사진을 가까운 지인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보았다. 한국문화를 공부하고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글쓴이는 이런 광고가 일으키는 마음의 부대낌을 언급하며 우리가 살아온 환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불행히도 우리들은 젠더 인식의 측면에서 미세먼지 '아주 나쁨'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모르겠다', '이해가 안 간다' 고 징징거리는 님들에게 이것을 말로 글로 가르쳐서 납득시켜야 하는 매우 피곤하고 비효율적인 위치에 있다."필자는 여전히 '모르겠다', '이해가 안 간다'고 징징거리는 님들에 포함된다. 페미니스트인 아내와 오랜 대화를 통해 약간은 개조된 의식을 가지게 된 상태가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필자는 분명히 '왜 저게 불편하게 하는거야?'라 물으며 글쓴이를 또다시 피곤함에 빠지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이런 피곤한 물음은 하지 않을 수 있는 수준에까지는 간신히 도달한 듯하다.
극단적인 가부장 문화가 호흡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우리 부모세대만큼은 아니지만 필자 역시 공고한 가부장적 체제가 당연한 환경에서 전형적인 남성으로 성장했다.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가부장 문화의 혜택을 맘껏 누리면서 말이다. 다행히 페미니스트인 아내를 통해 최근에서야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 아주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처음으로 페미니즘을 접했던 것은 90년대 말 대학 교양 과목을 통해서였다. '여성학 개론'이라는 강의였고, 교재는 시몽느 드 보브아의 <제2의 성>이었다. 강의의 세부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엔 나름의 뿌듯함과 대견함을 느꼈었던 것 같다. 부모세대와는 다른 관점으로 오랜 세월 차별받고 억압 상태에 있던 여성을 바라볼 수 있겠구나 하는 느낌.
그런데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니 이런 류의 강의는 필자의 성 의식을 정상화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던 것 같다. 성차별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남성 우월 관점에 물든 발언이 튀어나와 주변 페미니스트들을 깜짝 놀라게 하곤 했다. 고맙게도 그들은 필자의 왜곡된 관점을 교정해 주었다. 최근엔 메갈리아, 강남역 살인사건, 미스박 논쟁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필자의 성 의식이 느리게나마 '정상화'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필자의 무의식적인 성차별적 발언에 여성 페미니스트들이 강력한 비판을 가할 때는 솔직히 기분이 상하기도 했다. '도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요즘엔 여성들이 꽤 대접받지 않나?', '이건 오히려 역차별 아니야?'라는 생각을 안 했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남자라는 성별로, 가부장제라는 공기를 마시며, 한국사회에서 살아온 필자가 누려왔던 것들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란 것을 지금은 안다.
페미니스트들을 만나고서야 깨달았다